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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00:34

Plastic 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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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k, In-ah 탁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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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stic Eye

Through the logic of development according to climate change
and city expansion, human has rapidly destructed environment.
As a result, numerous kinds of animals have walked into
extermination and our friendly animals have left from us.
After animals disappear, indeed, how can human also be safe?
Although human seems to be in the center of this world, now,
in the space created exclusively by human, as appearance of a
fixed model and in the neglected condition, animals return to
us through sculpture for the beauty of our city, symbol of
advertisement, and kinds of toy for amusement.
In this age, in the balanced sight, I see strange appearance
that human and animal model are strangely living in the same space.

기후 변화와 도시 확장에 따른 개발의 논리로
인간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환경을 파괴해왔다.
그 결과 많은 동물들은 멸종의 길을 걸었으며
친근했던 동물들도 우리 곁을 떠났다.

동물들이 사라진 후에도 인간은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 같지만
사실은 동물들이 인간의 선험자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제,
동물들은 모형의 형태로.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간에서,
그들의 필연성을 무시당한 채 도시미관을 위한 조형물로.
광고의 상징물로, 유희를 위한 놀이감으로 박제가 되어

우리 곁에 돌아온 그들은 모두 플라스틱 눈이 되어 있었다.

인간과 동물모형이 한 공간에서
낯설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아이러닉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Plastic Eye

Tak In-ah-Animals between reality and absence

Park Young-taek(Professor of Kyung-gi University, Art critique)


As Freud indicates, 'Uncanny' exposes the hidden, and in doing so, it has the effect of changing the familiar into the unfamiliar. Uncanny is formed from something familiar, into something alienated by suppression. Thus Keuriseuteba claims uncanniness occurs where pleasure is suppressed. This effect of uncanniness is not a fear for something unfamiliar and new, but it appears through visibility of ambiguous closed areas that was hidden behind safety and naturalness. This illusive space, and also surreal space, can be considered a niche space that is hidden inside of reality. This air-of fantasy turns familiar into unfamiliar, secure into insecure, and visible into invisible.
The familiar, and insecure desire resurfaces, and Freud called it 'The revolution of the suppressed'. It is fantasy like this that provides vicarious satisfaction of the desire, and neutralizes the tendency to violate, therefore reconfirms the institutional order. Why are there so many of these familiar, but uncanny and fantastic, animal sculptures without any danger, fear, wild, or instinct, around in our everyday space?
Tak In-ah's photographs are asking us these questions about this phenomenon.

We have come to miss the old times when we used to dwell among them, and we have conjured them back to reality. Today, the meaning of animal instincts and existence has disappeared, and they have become visual objects, and they are used for human emotional appeal.

탁인아-실재와 부재 사이의 동물들 프로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이함은 감추어진 것을 폭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섬뜩하게 변형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기이한 것은 오래되고 낯익은 어떤 것이 억압되어 정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테바는 기이함이란 ‘쾌락이 억압되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이러한 기이함의 효과는 전혀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하고 자연적인 것 뒤에 감춰진 모호하고 폐쇄된 영역의 가시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때 그 환상성의 공간은 초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하고 현실 이면에 감춰진 틈새적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환상성은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안전한 것을 불안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한편 환상 속에서 오래되고 친숙한, 그러나 불안한 욕망들은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불렀다. 이런 환상성은 욕망의 대리충족을 제공하고 위반을 향한 충동을 중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제도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위험과 공포, 그리고 사나운 야성, 본능이 깡그리 지워진, 박제에 다름 아닌 이 친숙한, 그러나 기이하고 환성적인 동물 형상이 일상공간에 이렇게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탁인아의 사진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한 시절. 우리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공존했던 그들이 떠나가며 자취를 감추게 되자 다시금 그리워하며 현실의 세계로 호출한다. 오늘날 그 동물들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는 사라지고 시각적 오브제가 되어 인간들의 정서적 호소력을 위해 소비되고 있다.

중략.
< 박영책 미술평론 中 >
동물 기념비

글/ [한] 오영민(吴映玟)(미술사학 박사, 중국 중앙미술대학 강사)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로부터 온 시선은 유일무이하였다. 인간 주변의 어느 것도 동물과 같은 지위는 아마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인간은 이 세계를 주시함과 동시에, 놀랍게도, 동물도 같은 시선으로 같은 세계를 지켜보며, 심지어 인간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시선은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친절한 것처럼 보였다. 이리하여, 설령 동물과 인간 사이에 공통의 언어가 없어, 숙명적인 침묵이 유지되더라도, 이러한 무언의 반려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고 조화를 이루었으니, 동물은 고기, 모피와 동력의 공급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숭배되는 “신성한 동물”이거나, 혹은 신의 의향을 전달하는 “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에 유지되던 이러한 여러 가지 전통적인 관계는 “공업화”, “도시화”와 “현대화”의 진행과정에서 차츰 철저히 붕괴되었으며, 심지어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현대 사회에서, 실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동물은 철저하게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인류의 생활 공간에서, “동물”은 하나의 범주로서, 이미 그 중요성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맡지 못하며, 단지 집안의 애완 동물, 사육장의 제품, 혹은 동물원의 가련한 전시품이 되었다.
동물이 경관이나 이미지의 범주로 넘어간 것은 그 가장자리화의 또 다른 구현이다. 우리가 탁인아(卓仁芽)의 촬영 작품 “플라스틱 아이(Plastic eys)”에서 본 것은 바로 이러한 가장자리화 경향이 나타나고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동물원을 동물의 기념관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소홀하게 여기는 이러한 도시 모퉁이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동물 조각은 동물의 기념비라고 볼 수 있다. 도시에 안치된 이러한 동물과 흡사한 조각은 곧 동물이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철저히 철수하면서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명은 사실 일종의 보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동물 조각의 존재를 통해 과거 고대 세계에 속하는 꿈을 불러옴으로써, 인간 자신의 인격이 여전히 완벽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각을 대하고, 탁인아의 촬영 작품 “플라스틱 아이”를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만회할 수 없는 고독과 실망뿐이다. 여기에서, 동물은 보여지는 대상에 불과하며, “그들도 같은 눈으로 세계와 인간 자체를 지켜본다”라는 것은 이미 철저하게 의미를 잃었다. 우리가 찾은 것은 그 익숙하면서도 친절한 눈이 아니라, 허무한 “플라스틱 아이”이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서로 간의 응시는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 허무한 시선 중에서 그리워하고 추모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여가 가져온 손실은 현대 사회에서는 보충할 수 없는 것이다.

动物纪念碑

文/ [韩] 吴映玟(美术史学博士,中国中央美术学院讲师)


对于人类来说,来自于动物的目光曾经是独一无二的。在人类周遭恐怕再没有哪件事物可以具有与动物同样的地位。人类在注视着这个世界的同时,也会惊讶地发现,动物也在用同样的目光注视着同样的世界,甚至也注视着人类自身。这样的目光看起来是那样的熟悉而亲切。以至于,尽管动物与人类之间由于缺少共同语言,而保持着宿命式的沉默,但是,这种无言的相伴却显得异常的自然与和谐:动物既是肉、皮毛和动力的供应者,同时,又是被崇拜的“圣兽”,抑或是传达神的旨意的“使者”。
但是,人与动物之间所维系的如此种种的传统关系,在“工业化”、“城市化”和“现代化”的进程之中逐渐土崩瓦解,甚至被完全推翻。在现代社会之中,无论就实际还是文化而言,动物都被彻底地边缘化了。在人类生活的空间中,“动物”作为一个范畴,已经失去了它的重要性。它们不再是什么不可或缺的角色,它们只是家庭中的宠物,饲养场的产品,或是动物园中可怜的展品。
动物转入景观或是图像的范畴是其边缘化的另一种体现。我们在卓仁芽的摄影作品“人造之眼”(Plastic Eye)中所看到的正是这种边缘化倾向的呈现和放大。如果说动物园是动物的纪念馆的话,那么,这些静静地处于为人所忽视的城市角落之中的动物雕像则可以被看作是动物的纪念碑。这些安置于城市之中的仿真动物雕塑正是在动物开始全面撤离人类日常生活之时而发展起来的。这种新的发明其实可以被看作是一种补偿:人们在试图通过这些动物雕塑的存在来唤起一个属于过去古老世界的梦,以此来证明人类自身人格依然保持着完整。但是,当我们面对这些雕塑,面对卓仁芽的摄影作品“人造之眼”的时候,我们感到的却只是不可挽回的孤独和失望。在那里,动物只是被观看的对象,“它们也在用同样的目光注视着世界和人类本身”这件事已经彻底地失去了意义。我们找到的不是那熟悉而亲切的目光,而是空洞的“人造之眼”。动物与人之间那相互的凝视已经不复存在,而只能在这空洞的目光中怀念凭吊。这种缺失所带来的损失在现代的社会中则是无法弥补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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