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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몸의 귀환 Return Of The Body
전시기간 2017. 8. 24 ~ 9. 23
전시장소 KT&G 상상마당 갤러리Ⅱ (5F),
갤러리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어울마당로 65 (서교동) KT&G 상상마당 02-330-6200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sangsangmadang.com
관람시간 11:00-20:00 (*입장마감 19:30)
K는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 당한다. 그것들은 예민하고 얇고 속이 비친다. 연하고 엷고 약한 것들은 바삭댄다. 그래서 크고 묵직하고 단단한 것들보다 소리가 많이 난다. 그 허하고 공한 기척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힘센 사람의 한 번 기침에도 부서지거나 바스러질 수 있는 취약함. 그런데 밟히거나 문드러질 때는 큰 것들보다 겁이 없다. 뒤척이는 소리 한번 내고 이별하거나 흔적도 없이 꺼져버릴 수 있다. K가 M을 처음 봤을 때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 당하듯 그에게 끌렸다. 무언가에 매혹 당한다는 것은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K가 M을 동일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몸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또 너무도 닮은 몸의 비참함을 공유했다. M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고, K는 성기가 돌출된 남자의 몸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M은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낯설었고, K는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M은 오갈 데 없는 고아 같았고, K는 발가벗고 있는 바람난 과부 같았다. 그들은 타고난 몸으로 살고, 이성의 몸을 좋아하라는 ‘법’에 순응하지 못(안)했다. 너무도 당연시 여겨지는 법이지만, 그래도 법을 어긴 자는 죄인이 된다. 죄인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잠식된다. 그들은 법대로가 아닌 욕망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한 욕망은 댓가를 치뤄야 한다. 개인적 안정과 사회적 승인을 무르고 영혼의 불안과 소외의 처형을 받기로 했다. K와 M은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둘은 기억의 그물이 성글다. 무의식의 전략이다. 전략은 고통스런 기억을 삭제해주는 대신 몸에 수치심을 새겨두는 것이다. 부정적 사건이 다뤄지는 방법 중 망각은 가장 억압적이다. 걸려들었다. 무의식이 전략을 휘둘렀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목적은 생존이다. 변연계와 대뇌피질을 교란시켜 고통스러운 정서와 갈등을 완화하며 자기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돌연변이로 취급되더라도 그 방법은 그리 유해하지 않았다. 삶은 매 순간 최선의 길을 내기 때문이다.
  • ⓒ한경은 Han Kyung-eun
  • ⓒ한경은 Han Kyung-eun
    Invisible Vision, 120×90cm, Pigment print, 2015-17
  • ⓒ한경은 Han Kyung-eun
    Invisible Vision, 120×90cm, Pigment print, 2015-17
  • ⓒ한경은 Han Kyung-eun
    Invisible Vision, 120×90cm, Pigment print, 2015-17
  • ⓒ한경은 Han Kyung-eun
    Invisible Vision, 120×90cm, Pigment print, 2015-17
KT&G 상상마당은 오는 8월 24일부터 9월 23일까지 제 9회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KT&G Sangsangmadang Korean Photographer's Fellowship / 이하 KT&G SKOPF) 올해의 최종작가 한경은의 <몸의 귀환>展을 서울 KT&G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개최한다.

KT&G SKOPF는 새로운 가능성을 갖고 있는 한국사진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KT&G 상상마당의 대표적인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이다. KT&G SKOPF는 2008년부터 노순택, 김태동, 정지현, 노기훈 등 34명의 한국 사진가를 지원하고 함께 성장해왔으며, 이들 중 다수의 작가들이 국내외 사진상 수상과 해외 포토 페스티벌 초청으로 두각을 드러내며 동시대 한국 사진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한경은 작가는 지난 2016년 6월 9th KT&G SKOPF 올해의 작가로 선발되어 약 7개월간 멘토링과 지원을 받았다. 지난 12월 진행된 공개 포트폴리오 리뷰와 심사위원 심사를 통해 올해의 작가 3인 중 최종 작가로 선발되었다.

이번 <몸의 귀환>展의 전시 작품은 한경은 작가가 2015년부터 촬영한 ‘Invisible Vision’ 시리즈로 M과 K로 명명된 두 사람의 나체 사진 25여 점이다. 작가는 작업노트를 통해 이번 작업이 “조각나거나 왜곡된 기억을 재생시켜 현실을 비추는 과정”이며 “옷을 벗는 행위는 추상적인 내면이 실재하는 몸에 접근하기 위한 장치로 페르소나를 벗고 원초적인 몸과 관계하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9th KT&G SKOPF의 심사위원장인 정현은 한경은의 사진을 “M과 K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한 사람이 겪은 문제를 하나의 상황극으로 전환하여 두 인물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치유의 가능성을 상징적이고 표현적 방식으로 촬영한 프로젝트”로 설명하며 “한경은은 흔한 다큐멘터리 방식의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연극적 수행성 또는 사회적 연기(social acting)에 가까운 방식으로 사진매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주목 할 만하다”고 심사문을 통해 평했다.

한경은 작가는 9th KT&G SKOPF 올해의 작가인 박희자와 함께 오는 10월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미래色 2017’ 전시에 참가할 예정이다.

몸의 귀환 [Invisible Vision]


9th KT&G SKOPF 올해의 최종작가 한경은


K는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 당한다. 그것들은 예민하고 얇고 속이 비친다. 연하고 엷고 약한 것들은 바삭댄다. 그래서 크고 묵직하고 단단한 것들보다 소리가 많이 난다. 그 허하고 공한 기척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힘센 사람의 한 번 기침에도 부서지거나 바스러질 수 있는 취약함. 그런데 밟히거나 문드러질 때는 큰 것들보다 겁이 없다. 뒤척이는 소리 한번 내고 이별하거나 흔적도 없이 꺼져버릴 수 있다.

K가 M을 처음 봤을 때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 당하듯 그에게 끌렸다. 무언가에 매혹 당한다는 것은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K가 M을 동일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몸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또 너무도 닮은 몸의 비참함을 공유했다. M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고, K는 성기가 돌출된 남자의 몸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M은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낯설었고, K는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M은 오갈 데 없는 고아 같았고, K는 발가벗고 있는 바람난 과부 같았다.

그들은 타고난 몸으로 살고, 이성의 몸을 좋아하라는 ‘법’에 순응하지 못(안)했다. 너무도 당연시 여겨지는 법이지만, 그래도 법을 어긴 자는 죄인이 된다. 죄인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잠식된다. 그들은 법대로가 아닌 욕망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한 욕망은 댓가를 치뤄야 한다. 개인적 안정과 사회적 승인을 무르고 영혼의 불안과 소외의 처형을 받기로 했다. K와 M은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둘은 기억의 그물이 성글다. 무의식의 전략이다. 전략은 고통스런 기억을 삭제해주는 대신 몸에 수치심을 새겨두는 것이다. 부정적 사건이 다뤄지는 방법 중 망각은 가장 억압적이다. 걸려들었다. 무의식이 전략을 휘둘렀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목적은 생존이다. 변연계와 대뇌피질을 교란시켜 고통스러운 정서와 갈등을 완화하며 자기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돌연변이로 취급되더라도 그 방법은 그리 유해하지 않았다. 삶은 매 순간 최선의 길을 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기의 최선으로 그들은 ‘몸 바라보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망각의 호사도 누려봤으니 이쯤에서 구멍난 기억과 낯설은 몸뚱이를 만나볼 때다.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떠나봐야만 머물렀던 자리가 덤덤히 보이듯, 뭉개고 앉아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엉덩이 밑을 보려던 것뿐이다. 여행 중에 맞닥뜨리는 생소하고 변덕스런 공기에 신기해하고 유쾌해지듯이, 때로는 지루하거나 위험한 순간을 통과하면서 자기만의 동굴로 침잠하거나 서로의 곤혹을 위로하듯이, 그들의 여행도 그랬다. K와 M은 여행길에 많이도 떠들어댔다. 왜곡되거나 상처받은 기억을 배설하는 토봉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울고 웃다가 마음결이 닿는 곳에서는 말하기를 멈추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기억이 실재하는 몸에 접근할 수 있도록(혹은 몸을 통해 기억에 접근하거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원초적인 몸의 신호를 읽고 몸과 대화를 나눴다. 언어는 말이 안된다. 원래부터 해석 불가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행의 본질이 귀환이듯이 그들의 여행도 끝이 났다. 서로에 대한 동일시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몸을 비루하고 굴욕적으로 바라보던 시선도 거두어졌다. M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 낯설지 않다고 말하며, K는 자신의 몸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한다. K는 이제 집으로 돌아와서 무엇이 남고 무엇이 버려졌나를 떠올린다. 딱히 버려진 것도, 이렇다 할 남은 것도 없다. 다만 가끔은 벌거벗고 휘청거릴 때 통쾌하고 자유로웠다는 것, 적절한 한 때 신나게 잘 놀았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들은 자기만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우리가 뭘 했냐는 듯이, 우리가 어쨌냐는 듯이.

K는 바란다. 세상에 슬퍼서 아름다운 존재들은 무엇이 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비극과 불행의 냄새가 조금은 풍기기를. 진동하는 냄새는 대상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풍김은 그것이 거기 있다고 알아차리게 하니까 말이다. 나에게 주도권이 없는 고통을 껴안는 일은 행복해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존엄을 보존하고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K는 자신이 예민하고 얇고 가벼운 존재여도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여리고 약하고 속이 비치는 존재들과 계속 내통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아픔을 같이 한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타인을 껴안는 긍정의 야합이다. 우연적인 것들과,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비정상’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을 버무려 놀아재끼는 일이다.

조금 늦을 네게, 듀얼 모노드라마


양효실(미학자)


살과의 동거, 너와의 만남
너와의 ‘관계’는 대부분 내 자아의 확장에서 멈춘다. 너는 나의 일부를 던졌다가 다시 회수하기 위해 사용된 가림막 내지 거울이다. 투사는 자아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것이다. 긍정적 투사는 만남이나 대화라 불리고, 부정적 투사는 혐오나 배척이라 불린다. 나는 네게서 나의 밝고 긍정적인 자아 혹은 자아 이미지를 또 알아본다. 나는 너를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못한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지만 나를 보고 또 돌아온다. 이 외출은 무사하고 무난하다. 문은 닫힌다. 아니 문의 이미지, 안과 밖의 관념이 너와 나의 만남을 구조화한다. 긍정적 투사는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고 이 아름다움은 나의 사회적 자아를 보증한다. 너를 알아보는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따듯한 사람이다. 아름다움은 동일시이기에 연속적이다. 거기에는 틈이나 분열이 없다. 아니면 나는 너를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나의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부분을 뜯어 버린다. 나는 네게 나의 이면을 던져 놓고 또 돌아온다.
긍정적 투사와 부정적 투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나와 너는 경계를 가진 장소이고 너는 나의 투사를 위해 거기에 있다. 자기애는 의식적으로 타자에 대한 혐오와 겹치고,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자기혐오를 드러낸다. 내가 너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네가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인데, 그 사실을 외면해야 내 자아의 일관성과 연속성이 보증되므로 네가 타자라고, 네가 혐오스럽다고 비난하면서 나르시시즘에 오물이 묻을까 봐 빨리 문을 닫는다. 너는 늙었고 너는 추하고 너는 역겹다. 그래서 나는 젊고 아름답고 따듯하다. 긍정적 투사는 환원 / 회수이고 부정적 투사는 전가 / 차단이다. 자아의 확장인가 자아를 향한 위협인가가 내가 너를 만난 뒤 너를 정리, 해소하는 기준이다. 그렇기에 만남이나 대화라 불리는 그것은 허위이고 기만이다. 너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착하지도 악하지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다. 너 역시 나처럼 그렇고 그렇다. 만남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만남은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더듬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만남은 가까이 다가가 그저 그런 너를 만지며 살을 내놓는 것이다. 살은 따듯해서 위로가 되고, 물렁물렁해서 만지기 좋고, 동물적이어서 부끄럽다. 네 점, 잡티, 비어져 나온 코털, 해진 옷깃, 목주름 같은 것을 보며 ‘아이고, 나랑 같네’ 하고 알아보는 것이다. 너는 나이고 살이고 만져지는 것이다. 우리는 튼튼하고 건강한 자아의 환상을 자랑하기 위해 너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너와 네가 늙어 가고, 부풀거나 흘러내리고, 이미 아물었거나 이제 아물 상처를 갖고 있음을 알아보는 것이다. 현대의 질환은 이런 가까이의 만남이 불가능하고 이런 접근의 용기가 없어지는 것과도 연동한다. 이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만남은 친구들끼리나 하는 것인데 이런 친구 맺기 연습은 사회가 자꾸 빼먹고 건너뛰는 것 중 하나다. 오직 고립, 경쟁, 승리를 거치는 자아의 성공담은 너와의 가까움이 불가능하기에 정당화된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그 자체로 미덕이고 너는 네가 딛고 넘어가야 하는 장애물, 시련이다. 물론 너를 멀리할수록 나는 질곡에 빠진다. 나는 너를 지움으로써 나의 진실을 말할 채널을 잃는다. 내 진실은 네 몸에도 쓰인 것인데, 나는 너를 잃었기에 나도 잃는다. 나는 봉해진 입이고 열리지 않는 페이지다. 갇힌 말, 박힌 글자인 나를 그렇기에 내가 고문한다. 중요하고 대단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내 입을 쓰고 내 노트를 쓰고 있어서 나는 나에 대해 말하는 법을 자꾸 잊는다. 나는 자아라는 감옥의 수인이다. 내가 약하고 더럽고 사소하다는 비밀을 말하고 토해 내지 않으면 나는 계속 살지 못할 것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취약함, 허약함은 부정의 투사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자기혐오이고, 자아의 감옥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공격하며 살아가는 쪽으로 생존법을 계발한다. 사회적 자아에 비추어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자신은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자학이 나르시시즘의 폭정 안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나는 자기혐오의 ‘남성적’ 외화를 약자에 대한 남자들의 폭력에서, ‘여성적’ 외화를 자해에서 찾는다. 남성의 자기혐오가 사회적 약자의 몸을 겨냥한 이유 없는 폭력으로 발현되는 것과 달리 여성의 자기혐오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한다. 자해는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은밀해서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폭력이며, 피해자가 말없는 자기- 몸이기에 너무나 사적이고 은밀한 폭력이다. 여성의 자해는 갇힌 몸이 일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틈이고, 절개된 피부 사이로 공기가, 휴식이, 쾌락이 들어온다. 자해는 나르시시즘 감옥의 일시적 방전, 블랙아웃이다. 여자들은 피를 흘리며 혐오스런 자기와 잠시 휴전한다. 여성이 자해를 ‘즐긴다’면, 이는 자해가 자아의 감옥에서 찾아낸 탁월한 생존법이며 ‘유전’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폭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적 자아와, 폭력을 자처하지 않으면 삶이 어려워진다는 역설 사이에서 우리는 여성의 몸을 상대로 일어나는 자기 폭력의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 자해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약자가 살기 위해 벌이는 제의다. 당신이 조금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몸을 일기장이나 ‘회색 노트’처럼 사용하는 여성들이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혐오스럽거나 추한 걸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독하게 살려고, 죽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거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늘어지고 접히고 베여서 상처 나고 흉터가 생긴 몸은 우리 모두 지금은 살아 있음을, 앞으로도 살아가려 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몸은 자아의 제국에서는 잉여 혹은 잔여일 테지만 생존의 장소에서는 전부이고 내 자리에 나 대신 들어선 타자다. 그렇기에 너이고 그렇기에 결국 나다. 내가 너와의 만남에 실패하는 것은 우선 내가 누군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살이고 상처이고 흉터이고 네가 놓고 간 노트이고 잘 안 읽히는 몸-글이다. 그런 나와 역시 그런 네가 만나면 우리는 별것 아닌 몸, 살, 흉터를 보여 주면서 서로를 알아보고 시시한 이야기를 비밀처럼 혹은 시시한 농담처럼 나눈다. 우리는 좀 쉰다. 자아의 확장이나 자아의 승리를 위한 싸움뿐인 이 나라에서, 우리는 또 문을 닫고 자아의 감옥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어딘가에서 우리는 나도 너도 없이, 말하자면 머리 없는 몸뚱이처럼, 덤으로 얹힌 흉터처럼, 누가 입히고 떠난 상처처럼 알 듯 모를 듯 만난다.

한경은 작가는 늘 이런 만남을 일으킨다. 나는 경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쇼킹 패밀리, 2008›에서 경은을 봤고 오래전에 봤기에 잊고 있었다. 가끔 경은을 떠올린 것은 그녀가 자신의 팔뚝에 낸 상처, 자해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10대 소녀나 여학생의 자해는 인터넷에서 혹은 주변에서 자주 듣고 보지만, 유부녀가 남편이 있는 집 어딘가에서 자해한다는 이야기는 몇 사람 건너서 듣고 있었지만, 바로 ‘그녀’가 내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고 나는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약점, 불행을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버젓이 들려주는 경은은 역시 자기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들려주는 경순처럼 자기 삶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타입의 유쾌한 여성이기에 좋았다. 둘은 이 삶이 어쩔 수 없는 내 삶이라는 것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약점이나 불행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면,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몸에서 뺀 가시이고 흉터이기에 더 이상 중요한 문제, 혐오스런 비밀이 아닌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경은을 만난 날 우리는 인사동 편의점의 파라솔에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속이 안 좋았고 그녀는 막 힘든 일을 하고 온 뒤라 맥주가 둘 다의 몸에 유익해 보였다. 나는 곧 속이 좋아졌고 처음 만난 작가와의 미팅도 덩달아 좋아졌는데 우리는 이미 시시할 대로 시시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 별자리 점, 경순, 동전파스, 남자 같은 것을 놓고 수다를 떨었다. 꼬마약과를 안주로 각자 맥주 세 캔을 비웠고, 찌는 듯한 더위에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내는 우리가 먼저 일어서며 인사하자 ‘징글징글’이라고 우리가 쓴 부사를 되뇌어 주었다.

나를 보여 주면 너는 말하고 네 말은 내게도 있었다
‹목소리, 2008 – 2011› ‹기억의 가소성, 2012 – 2013›에 이어 이번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KT&G SKOPF) 선정 연작인 ‹비가시적 전망, 2015 – 2017›은 모델이나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동일한 문법을 사용한다. 경은은 모델들에게 우선 자신의 몸, 흉터, 살을 보여 주었다. 얼굴 없는 여자들이 자기 배를 내보이며 앉아 있는 사진 연작인 ‹목소리›는 경은이 자기 배를 찍은 사진을 모르는 여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시작되었다. 20대 남녀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의 말을 목, 손, 얼굴 등에 그리고 찍은 사진 연작인 ‹기억의 가소성›은 추측컨대 경은의 팔뚝 자해를 축으로 움직인 것 같다. ‹비가시적 전망›은 자신의 여성성 내지 모성과 화해한 지 얼마 안 되는 경은이 자신의 몸과 화해하려고 노력 중인 M과 함께 번갈아 찍은 ‘누드’ 사진이다. 모델과 작가의 관계는 위계적이다. 좀 더 예민한 작가는 모델에게 자신의 의도를 알려 줄 수도 있지만, 대체로 모델은 아무런 내용도 모른 채 작가가 설정한 무대에 서서 셔터 소리만 듣는다. 설령 작가가 모델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자신의 일부를 나눠 준다고 해도 사진은 결국 작가의 프로젝트이고 예술이다. 경은은 취약한 자신의 몸을 먼저 보여 줌으로써 경은에게 자기 몸을 드러내야 할 모델과의 관계를 무사히, 빠르게 설정한다. 작가와 모델은 닮은 몸, 그러므로 비슷한 이야기가 쓰인 바탕이므로, 그러므로 서로를 알아본 친구로 재배치된다. ‹쇼킹 패밀리›가 보여 준 것처럼 더 이상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가 곧 자신이며, 수치와 혐오의 진원지로서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경은이기 때문이다. 경은은 자신의 이런 변화와 받아들임을 사진을 활용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 주려고 한다. 작가와 모델의 관계는 용기 있는 사람과 아직은 부끄러운 사람의 관계로 바뀐다. 경은은 모델들에게도 이미 있는 것을 자기 것을 경유해서 나눠 주려고 한다. 감춘 것이 드러나고 서로를 알아볼 때, 나만의 문제 / 비밀은 공적인 ‘재산’, 나눠 가짐으로써 평등해지는 공공재임이 밝혀진다. 사회적 자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적이면서 집단적인 몸도 우리가 함께 모여서 살아가기에 발생한 역사의 산물이다. 경은의 사진은 그녀가 찾아가 방문한 여자들, 아이들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상처를 드러내기에 ‘사회적 사진’의 일환이고, 거기에 자신의 사적 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 사진’의 배음이 깔린다. 예술 치료 전문 과정을 밟은 경은에게 사진은 단지 심미 장치나 사회 도구가 아니다. 그녀는 ‘수동적이고 영적인 도구’인 사진이 ‘의식과 무의식이 체현된 공간’인 몸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경은은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을 각인한 장소로서의 몸을 수동적이면서 영적인 사진과 잇고, 서로가 서로를 미메시스하게 만든다. 경은은 도구로서의 사진이 인간의 영적인 만남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으며 사진기를 든다. 그 영적인 만남이 전제적 자아의 폭정에 저항하는 몸의 물질성을 통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때 몸은 억압에서 벗어난 감각의 자발성과 즉흥성, 지각적 순수의 장소 같은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몸은 사회적 장소이고, 그렇기에 만남이 일어날 수 있는 플랫폼이고, 너와 나의 공통된 기억을 건드리는 촉매제다.
여자의 몸으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M은 경은과 사진을 찍기 시작할 무렵 몸과의 불화를 자기혐오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을 만큼만 자기와의 대면을 진행했다고 한다. 타자로서의 자신을 살해하는 쪽에서 타자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는 쪽으로 이행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자신은 ‘각성’을 통해서나 받아들이는 어려운 진실이다. 그러므로 M이 혐오를 운명으로, 분노를 평정심으로 진정시키려고 할 즈음에 시작된 두 사람의 여행, 협업에 대해 따듯하고 소박한 경은이 느꼈을 책임감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경은은 M과 알고 지내는 사이다. 둘은 ‹비가시적 전망›에서 버디 무비의 여주인공들처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을 찾아내 번갈아 가며 상대의 벗은 몸을 찍었다. 숲, 바닷가, 바위, 방치된 건물, 굴삭기 공사장, 물속, 여관방 같은 공간이 읽히고 여름과 겨울, 밤과 낮 같은 시간이 감지된다. 한겨울 눈 내린 바깥, 한여름 회오리치는 물속, 바람 부는 들판에서 M과 K는 도망간다, 밀려난다, 당한다, 저항한다, 숨는다, 갇힌다, 노출된다, 목격한다, 외면한다, 쉰다, 휩쓸린다, 고립된다 등의 동사(動詞)로 몸을 재구성했다. 벌판에서, 옥외에서,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친구와 둘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몸, 계속 부인하는 몸, 화해했지만 아름다워진 것은 아닌 몸을 갖고, 아니 몸과 함께 ‘동사’를 수행하는 몸은 그렇기에 명사의 감옥에서, 여성과 몸과 자아의 감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늘 자아가 주인인 몸이 자아가 들어와 웅크릴 새도 없이 움직이고 느끼고 행동한다. 둘은 아이처럼, 짐승처럼, 유령처럼, 악몽처럼, 시체처럼, 그날처럼, 거기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유기된 풍경에 개입했다. 이런 점령, 이런 스쾃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약자의 벌거벗은 몸,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몸,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몸이 일으키는 시위, 개입이라는 점에서 쉽게 또는 제대로 읽힐 수 없다. 관객인 우리는 이 사진 앞에서 긍정적 투사나 부정적 투사 같은 동일시 기제를 작동시킬 수 없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훔쳐보는 우리, 둘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려는’ 구경꾼에게 도통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상황에 몰입했고 사진기 역시 그 상황 안에 들어가 있다. 경은의 사진은 잘 나온, 보기 좋은, 우리를 유혹하는 사진이 아니다. 경은의 사진 속 네이키드는 우리가 보아 온 어마어마한 양의 누드 사진에 비추어 본다면 한없이 시시하다. 특별한 관계를 ‘기억’하고 ‘증언’하기 위한 사진들이 그렇듯이 M과 K의 사진에 우리의 자리는 없다. 둘은 우리를 위해 찍은 것도, 보여 주기 위해 찍은 것도 아니다. 이 사진은 상황에, 그녀들의 기억과 몸에 충실하고 그렇기에 내적으로 닫혀 있다. 나르시시즘이나 투사는 우리의 기제이기에 역시 또 일어날 테지만 별로 만족스럽진 못할 것이다. 둘이 선정한 바깥 풍경은 거칠고 공격적이고 스산하고 위협적이다. 자해를 즐기는 여성들이 감행하는 적당한 폭력처럼 노출된 맨살은 쓸리고 얼고 다쳤을 것이다. 비타협적인 바깥의 무심함과 냉담함을 자신의 몸이 말하기 위한 바탕, 소재로 사용하는 대담함은 상처 입은 사람은 단지 무력한 사람이 아님을,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고 강화하는 데 탁월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상처는 누구나 입지만 그 상처를 통해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상황, 누구나 처한 삶의 조건을 연출해 낼 힘을 ‘얻는’ 사람은 많지 않다.
M과 K의 협업 사진은 실내에서 찍은 몇 장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얼굴 없는 여자들, 대가리가 벽에 박히고 계단 아래로 고꾸라지고 가스오븐에 머리를 밀어 넣고 벽 틈에 끼이고 천에 싸인 여자들은 사람이 살 것 같지는 않은 실내에서 오히려 더 위태롭고 불안한 상황에 처한다. 바깥은 동사의 세계이지만 안은 명사의 제국이고, 여기서는 누구나 지옥 같은 타인이며 내 몸 역시 그렇다.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사회이고, 사회는 자기를 혐오하게 만드는 기제로 사회적 자아를 양육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자기와의 불화는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에게는 필연적인 상황이자 과정이다. 모델하우스처럼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실내에서 둘은 고립, 갇힘, 자살, 자학의 이미지를 실연한다.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상의 감각이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아름답고 따듯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을 터다. 결국 그런 것이다. 해피엔딩이나 상황 종료, 미션 완수 같은 환상적 / 동화적 결말은 없을 것이다. 대신 그런 현실을 가감 없이 몸으로 감각하고 노출하고 연출하는 일이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극복’의 과정으로서 정당화될 것이다. 경은의 말대로 ‘지속적인 자기 개방의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욕구를 검증하는 자기 치유의 덤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가시적 전망›의 마지막 사진은 둘이 천을 쓰고 함께 나오는 사진과 M의 팔뚝을 근접 촬영한 사진이 차지한다. M은 사진을 찍기 며칠 전 자신이 몸에 새긴 글자를 지우는 시술을 받았다. M에게 절대적 의미였을 글자, 단어는 이제 부풀어 오른 살, 그 안을 채운 짓물에 의해 흐릿해졌다. p나 l, c나 e 같은 글자가 얼핏 보이지만 더는 읽힐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자신을 정체화했을 글자를 지우는 중인 M을 근접 촬영한 사진에서 우리는 피부, 털, 상처를 함께 본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아문 상처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지운 듯한 흉터는 남을 것이다. 살은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적히는 바닥이고 우리가 언젠가 적었던 노트이고 이제는 담담히 꺼내서 교환하는 닮음이고 언젠가 자랑할지도 모르는 약속이다.
그리고 천을 쓴 벌거벗은 두 여자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비가시적 전망›을 진행하면서 경은이 찍은 자화상이다. 두 여자는 모두 경은이다. 경은은 천의 매듭이 묶인 오른편 여자를 M으로 상상하면서 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왜 이 사진이 연작의 ‘마지막’이 아니라 중간에, 경은 혼자서 둘을 연기하는 사진으로 찍히고 ‘끝’으로 들어간 것인지 모른다. 시간의 연속성을 중간이 끊는 이런 구성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완성은 시간의 완만한 추이를 따르는 자아의 노동 방식이기에 그렇다. 나와 너는 나와 나로, 그러나 비대칭적인 나와 나로 대체되고, K가 M을 알아본 것은 M이 곧 K였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네가 없을 때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간들 우리는 계속 우리일 것이다. 나는 네게서 나를 알아보고 널 연민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부인하고 실망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밟지 않는다. 이 사랑은 결핍을 알아보는 만남이기에, 그 결핍을 우리가 동등하게 지닌 것으로 환대하는 사랑이기에 끝을 모르는 사랑이다.
이 사진이 M에게 주는 K의 ‘선물’이라는 경은의 말이 맞다면 이 사진에서 M의 자리에 들어간 K는 혐오스런 자기를 이미 자기로 받아들인 K가 먼저 가 있는 곳에 곧 M이 도착할 것을 알리는, 곧 도착하리라는 희망을 알리는 사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진이 아름답다. 왼편의 천을 쓴 여자는 카메라 셔터가 터질 때 고개를 치켜들었다. 몸을 쭉 뻗으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몸’의 외출과 반격에 충실했던 연작의 문법을 어긴 이 사진, 이 세미-누드 자화상 사진에서도 몸은 역시 동사이다. 정(靜)의 순간을 동(動)의 ‘의욕’이 반격한다. 감춤과 순종, 보호의 은유가 인용되면서 반박당한다. 대칭의 상황을 비대칭의 구성이 횡단하면서 몸이 슬쩍 외출한다. 몸은 움직이고 말한다. 어디에서건.
바깥에서 M이 아주 가까이 끌어당긴 경은의 몸이 ‹목소리›에서 계속 중계된 여자들의 몸과 포개지듯이, M의 팔 흉터는 ‹기억의 가소성›의 연출된 상처들과 포개지면서 경은이 계속 가고 있는 어딘가의 모습을 암시하고 현시한다. 경은은 몸으로 산다는, 혹은 몸이 산다는 우리의 별 볼 것 없는 불운과 역경이 우리를 함께 있도록, 약하게 함께 있도록 한다는 것을, 거기서 우리는 잠시 전쟁과 승리와 성공의 악몽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네 몸과 내 몸의 닮아 있음을 통해 서로를 알아본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말’하고 있을 것 같다.

한경은(Han Kyung-eun)


개인전
2017 ‘몸의 귀환’,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4 ‘기억의 가소성‘, 프로젝트 스페이스 The Room(토탈미술관), 서울

단체전
2017 ‘사진 미래色 2017’, [Invisible Vision], 고은사진미술관, 부산(예정)
2016 ‘자아내다’, [기억의 가소성], 한국미술관, 용인
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
2015 ‘Lies of Lies: On Photography, [invisible vision_#1, #2], Huis met de Hoofd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5 ‘거짓말의 거짓말’, [invisible vision_restoration and balance], 토탈미술관, 서울
2014 ‘Art of Heungkuk 움직이는 갤러리’, [위버멘쉬], 흥국생명, 선화예술문화재단
2014 ‘Photography Unknown’, [기억의 가소성], 아트스페이스J, 분당
2013 ‘TRIALOG', [Untitled], 주한독일문화원, 토탈미술관
2013 ‘The Show must go on_Singapore', [Untitled], Praxis Space, ICAS, 싱가폴
2013 ‘RoadShow 2013', [심(沈)의 위기와 회복], 토탈미술관, 백령도&인천
2013 ‘사진과 사진’, [묵정墨井], KT&G 상상마당, 서울
2013 ‘사진 미래色 2013’, [묵정墨井], 고은사진미술관, 부산
2012 'homo empathicus', [묵정墨井], 브레다미술관, 브레다, 네덜란드
2009 ‘2009플랫폼 인 기무사’, [Voice], 아트선재센터, 서울
2008 ‘거울 보는 약장수는 신파다’, [나는 신파다], 갤러리 소굴, 서울
2006 ‘해피퍼즐’, [해피퍼즐], Art Outside Gallery, 도쿄, 일본

수상
2016 제 9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KT&G SKOPF) 올해의 최종 작가 선정
2012 제 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KT&G SKOPF) 올해의 작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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