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362 추천 수 0 댓글 0
Extra Form
전시제목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과 기억의 소환
전시기간 2017. 8. 21 ~ 9. 12
전시장소 사진 미술 대안공간 SPACE22
갤러리 주소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빌딩 22층 T.02 3469 0822
작가 홈페이지 http://www.space22.co.kr
기타 2017년 10월 18일- 11월 5일
서학동사진관 (전주시 완산구 서학로 16-17)
T.063-905-2366_ blog.naver.com/jungmiso77
전시기획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사진가 구보 씨의 ‘경이의 방’》은 사진아카이브연구소에 소장된 사진 자료들을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기반의 기획 전시이다. 전시 타이틀로 사용된 ‘경이의 방’(Wunderkammer)‘은 15~18세기 유럽에 수집 붐이 일면서 생겨난 “진귀하고 이국적인 물건들을 수집·진열해 놓은 사적 수장고(작은 서재, 진열실)”를 의미하며,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이라고도 불렸다. 근대 유럽인들의 ‘경이의 방’에는 실제 사물들이 아카이빙 되었다면, 사진술 발명 이후의 ‘경이의 방’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촬영한 사진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사진이미지로 가득 찬 그 방의 주인공을 ‘사진가 구보 씨’로 지칭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진가 구보 씨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구보 씨를 차용한 것은, 사진가란 필연적으로 고현학적 방법론으로 현대와 현대인의 삶을 기록하고 해석하고 연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 속 구보씨가 견지하고 있는 고현학자의 태도와 입장을 투영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시각적 백과전서를 지향하는 ‘사진가 구보 씨’의 수집품을 대상으로 21세기 ‘경이의 방’이 꾸며질 예정이다.
  • 정치인이 사진수정사를 만났을 때
    김대중
  • 정치인이 사진수정사를 만났을 때
    김영삼
  • 정치인이 사진수정사를 만났을 때
    박태준
  •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
    apple 라디오
  •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
    gold star 라디오
  •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
    national panasonic 라디오
  •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
    sony 라디오
  • 중정(中情)식 분류법
    간첩 증거품사진
  • 중정(中情)식 분류법
    간첩 증거품사진
  • 반공의 일상, 일상의 반공
  • 반공의 일상, 일상의 반공
  • 반공의 일상, 일상의 반공
    보은농업고등학교 훈련부 일동, 1962
  • 동상과 기념 사이
    김구 동상(백법광장)
  • 동상과 기념 사이
    제5중대 제9소대 단체 기념사진, 1964 _ 이순신 동상, 윤효중, 1952(진해)
  • 새나라새마을새살림
    새마을
  • 새나라새마을새살림
    새살림
  • 새농민·표상, 새농민표·상
    『새농민』 1968년 7월호 표지 (모델 이수미, 촬영 김한용)
  • 새농민·표상, 새농민표·상
    『새농민』 1968년 8월호 표지 (모델 김영옥, 촬영 김한용)
  • 새마을주택 모델하우스 (농촌표준주택아카이브)
    농촌표준주택설계도(15평 가형)
  • 새마을주택 모델하우스 (농촌표준주택아카이브)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제촌마을의 새마을주택, 1977
  • [동영상]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
    부산-대구간 고속도로 개통식, 1969
  • [동영상]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
    도시 새마을운동, 1974
  • [동영상]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
    포항제철공장 착공식에서 발파 스위치를 누르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철 사장, 1970.4.1
  • [동영상]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
    직장 새마을운동, 1974
《사진가 구보 씨의 ‘경이의 방’》은 사진아카이브연구소에 소장된 사진 자료들을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 기반의 기획 전시이다. 전시 타이틀로 사용된 ‘경이의 방’(Wunderkammer)‘은 15~18세기 유럽에 수집 붐이 일면서 생겨난 “진귀하고 이국적인 물건들을 수집·진열해 놓은 사적 수장고(작은 서재, 진열실)”를 의미하며,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이라고도 불렸다. 근대 유럽인들의 ‘경이의 방’에는 실제 사물들이 아카이빙 되었다면, 사진술 발명 이후의 ‘경이의 방’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촬영한 사진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사진이미지로 가득 찬 그 방의 주인공을 ‘사진가 구보 씨’로 지칭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진가 구보 씨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구보 씨를 차용한 것은, 사진가란 필연적으로 고현학적 방법론으로 현대와 현대인의 삶을 기록하고 해석하고 연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 속 구보씨가 견지하고 있는 고현학자의 태도와 입장을 투영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시각적 백과전서를 지향하는 ‘사진가 구보 씨’의 수집품을 대상으로 21세기 ‘경이의 방’이 꾸며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과 기억의 소환’이라는 주제로 ‘경이의 방’을 꾸몄다. 박정희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1960~70년대(정확히는 1961년~1979년)는 한국사진사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엘리트 아마추어사진가들의 등장으로 모더니즘 사진이 모색되었고,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사진부가 신설되어 사진이 예술로 공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 사진과가 설치되어 전문적인 사진제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물론 이번 전시가 사진계를 중심으로 한 예술제도 안에서의 사진적 실천을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제도 밖에서 생산된 사진 표상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살아왔거나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개별 주체들의 다양한 기억을 소환하고자 한다. 소환된 기억은 그것이 추억이든 반감이든 또는 이질적이고 낯선 공간처럼 이해되든, 이 시대를 다기하게 분산시킴으로써 1960~70년대가 ‘하나’의 박정희 시대로만 읽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반영론적인 읽기를 지양하고 사진의 작동 방식과 표상효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가령 박정희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는 ‘반공’인데, 이 전시는 반공담론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반공이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대중과 만났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반공의 효과’에 사진이 어떻게 공모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즉 반공에 대한 집단기억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공식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진이 시각매체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시는 사진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고자 한다. 1880년대 초반 사진술 도입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깊숙이 정착된 사진문화는 시대에 따라 많은 부침을 겪어왔는데, 사진문화의 양상이 1960~70년대에 이르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인문사회학계의 다양한 평가 작업과는 결이 다른 사진 매체 중심의 시각문화사의 지평을 확장시켜줄 것이다.
아카이브 1. 정치인이 사진수정사를 만났을 때 (정치인 아카이브)

흑백사진 시대에 컬러사진을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이 사진용 안료를 이용한 채색이었다. 채색사진이란 말이 상용화되기 전에 ‘미술사진’이란 용어가 쓰였던 적도 있었다. 1900년대 초반 사진관 광고에서 많이 등장했던 이 용어는 변색과 퇴색으로 인해 사진의 수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 사진의 보존성을 높이기 위한 사진기술의 하나였다. 따라서 미술사진이 가능한 사진관은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 사진관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사진관 사진사들은 고객의 초상사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촬영단계나 현상단계에서 발행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정과 보정 작업을 병행해왔다. 사진사가 주로 수정과 보정 작업을 수행했지만, 전문적인 사진수정사들을 두어 전담시키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선명사장(鮮明寫場)에서 제작한 인물사진이다. 수정한 흑백사진 위에 채색한 사진으로, 미술사진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1960~70년대 사진관문화사를 엿볼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고급 사진관마다 사진수정전문가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포토샵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디지털 사진문화가 아날로그 기반의 사진관을 밀어내면서 사진수정사들도 사려졌다.
이 사진들은 1971년 동아공론사에서 발간한 『인물사진명감』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제7대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무위원, 제8대 국회의원 그리고 실업계의 단체장과 금융계의 은행장(長)들의 프로필사진이 실려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로 국회의원 사진들을 중심으로 정치인 아카이브를 구성했다. 여기서 촬영된 대상은 정치인이지만 그 정치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정치인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떠했는지와 같은 정치담론을 반영론적으로 읽어내기보다는, 사진의 재현방식과 사진문화사를 위한 텍스트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 정치인 아카이브는 1968년 동지문화사에서 제작한 <한국지형지세조감지도>와 함께 구성되었는데, 이 조감도는 사진과 지도를 통해 국회의원(지역구 및 전국구)들의 지역별 분포를 한 눈에 보여준다. 전체적인 정치적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 위에 사진이 갖는 즉각성과 신속성이 보태져,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새 시대를 예고한다. 그것이 상호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이라는 점만 빼면 근대성의 일상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아카이브 2.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 (라디오아카이브)

누구에게나 ‘라디오’하면 떠오르는 추억 하나쯤 있을 것이다. 지금은 TV나 인터넷, 모바일 기기 등에 밀려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라디오를 통해 즐겨 듣던 방송프로그램과 그 진행자를 아직도 기억하는 일반 청취자들이 여전히 옛 추억을 전하기도 한다. 한때 라디오는 중산층의 지표이자 중요 재산 목록 중의 하나였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어간 라디오는 시인 김수영이 <금성라디오>(1966)라는 시에서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五백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고 고백했듯이, 1960년대 들어와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하지만 라디오의 일상화는 모든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근대적 인식의 균질화 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라디오와 확성정치”(마셜 맥루한)의 효과를 일찍이 발견한 이승만 정권은 앰프촌 건설을 통해 균질화된 국민 만들기에 나섰으며, 이는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보태 1962년에는 ‘농어촌라디오보내기운동’까지 전개되었다. 1960년 금성사에서 국내 최초로 트랜지스터라디오 개발에 성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69년 3월 17일 청소년을 위한 심야토크 프로그램으로 출발한 ‘별이 빛나는 밤에’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최장수 라디오프로그램이다. 1969년은 이수근이중간첩사건(1월)을 시작으로 주문진무장간첩사건(3월), 유럽간첩단사건(5월), 흑산도무장간첩침투사건(6월) 등 수많은 간첩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에서는 간첩활동에 사용된 증거품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무전기를 비롯하여 공작금, 암호문, 난수표, 불온책자, 침투복, 위장복, 권총, 무전기, 나침반, 독약, 위조주민등록증, 시계, 카메라, 수신용 라디오 등 간첩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물품들이 등장한다. 이 물품 중에서 간첩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증거품 이 ‘라디오’였다. 1960~70년대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한방송을 듣다 잡혀간 일반 청취자들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던 시대였다. 또한 초중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외어야했던 10가지 ‘간첩 식별법’ 중에는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북한방송을 청취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이 시대의 ‘라디오’는 간첩의 지표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간첩 증거품 사진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떼어내어 아카이빙 했다. 이 라디오아카이브를 제조회사별로 분류하여 구성했는데, 간첩들이 가장 선호한 라디오는 당시 한국보다 기술력이 앞섰던 일본 제품들(소니, 내셔널 파나소닉, 샤프 등)이었으며, 그 중에서 소니 제품이 단연 앞섰다. 국내 제품으로는 1959년 국내 최초로 진공관 라디오 개발에 성공하고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생산하기 시작한 금성라디오가 그 뒤를 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라디오를 수신하는 다양한 청취 주체와 시대적 표상으로서의 라디오, 그리고 그 사이의 다양한 기억의 집합들을 소환하고자 한다.

아카이브 3. 중정(中情)식 분류법 (증거품아카이브)

<중정식 분류법>(증거품아카이브)은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라디오아카이브)와 짝을 이루는 아카이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자의 이미지는 전자의 사진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프레임과 재프레임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는 현대미술에서 즐겨 다뤄온 주제이며, 주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전략 중 하나였다. 즉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가들은 하나의 작품(텍스트)이 모든 외부적인 요소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자기완결성을 띤다는 모더니즘의 논리에 대해 부정하면서 그 작품이 놓이는 맥락(컨텍스트)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게 된다는, 그래서 의미란 고정된 것이라 아니라 가변적이고 다의적이라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특히 반모더니즘 작업을 위해 오브제 개념을 차용하여 맥락 짓기를 시도했는데, 기성품/기성이미지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재맥락화 하는 작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이미지는 현대미술에서 대표적인 오브제로 부상되었다.
여기서 사진의 프레임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라디오아카이브는 증거품아카이브에서 재프레임된 이미지 모음이라는 점에서 프레임과 재프레임의 관계를 묻고 있다. 사진에서의 프레임은 현실을 ‘낯설게’ 하는 동시에 사진적 현실을 실제 현실로부터 탈맥락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의미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며, 이런 점에서 프레임은 맥락 짓기의 주요한 기제가 된다. 또한 재프레임 작업을 통해 원본 사진과 그 사진이 갖는 의미를 해체하고, 역으로 해체된 원본을 다시 조립하여 새로운 맥락 짓기를 시도할 수 있다. 결국 프레이밍을 통한 아카이브 구축은 맥락 짓기의 또 다른 이름이며, 라디오아카이브를 위해 채택한 방법이었다.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빌려 새로운 맥락 짓기를 시도한 <중정식 분류법>과 <별이 빛나는 밤에, 간첩과 라디오>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예민하고 꺼내기 불편한 주제인 ‘간첩’ 이야기를 다양한 시대적 수사로 풀어놓고 있다. 특히 <중정식 분류법>은 아카이브 기반의 작업과 전시가 보여주는 구성방식 내지 진열방식에 대한 메타포로 제시된다. 중앙정보부는 간첩 검거 후 압수한 소지품들을 흰 배경지 위에 올려놓고 증거품으로 제시했는데, 일정한 방식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가급적이면 버드아이앵글로 촬영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한 눈에 모든 증거물을 알 아 볼 수 있도록 종별(무기류, 화페류, 장비류, 서적류 등)로 정리하고 한다. 라디오는 가장자리에 위치시키며, 총기류의 총구는 왼쪽을 향하게 하는 등 특정 물건들은 일정한 배열방식을 고수한다. 또한 어두운 톤의 물건들은 가장자리에, 밝은 톤의 물건들은 중앙 쪽에 위치시켜 시선의 분산을 막고 있으며, 나아가 각 증거물마다 라벨을 붙여 해당 물건이 무엇인지 의미를 정박시킨다. 가히 중앙정보부 식 배열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의 전시기법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증거품사진이 ‘증명’에 관한 이중투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진은 대상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존재증명의 도구가 되었고, 이로부터 증거능력을 획득했다. 반면 간첩의 소지품은 그것을 소지한 인물이 간첩임을 증명한다(고 제시되었다). 따라서 증거품사진 간첩임을 증명하는 증거품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증명에 대한 이중투사이다. 그런데 간첩사건 중에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적지 않은 간첩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경우 증거품은 간첩의 표상을 위해 동원된 조작품이 되며, 외려 증거물의 소지자가 간첩이 아님을 증명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증거품사진은 본연의 존재증명을 포기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증거품아카이브’는 메타비평을 위한 텍스트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아카이브 4. 반공의 일상, 일상의 반공 (반공아카이브)

선도부 또는 기율부, 규율부 등의 이름으로 학생이 동료 학생을 단속·감시하는 제도가 아직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제14회 보은농업고등학교 졸업앨범』(1962)에 실려 있는 것으로, 선도부의 또 다른 이름인 훈련부 학생 일동이 교사들과 찍은 단체 기념사진이다. 팔에는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이라고 쓰인 완장을 두르고 있고 호루라기를 목에 건 학생들도 보인다. 통일된 교복과 완장, 엄격한 포즈 등에서 계급에 따른 서열관계를 보여주는 군대 체계와 군사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사진을 통해 선도부 제도의 기원을 쫓거나 그것이 일제의 잔재라거나 권위주의정권, 군사정권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경으로 보이는 교사 입구에 쓰인 ‘간접침략을 분쇄하자’는 표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표어는 다른 단체기념사진에서도 보이는데, 여기서 ‘간접침략’이란 무력을 통한 ‘직접침략’과 대비되는 말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난 군사 용어이다. “직접 무력을 쓰지 않고, 다른 나라의 반정부단체 등을 교사(敎唆)·지도·지원하여, 무장봉기·내란(내전)·소요 등을 유발시키는 침해행위”, “선동·음모에 의한 내란 및 기타의 파괴활동, 질서·생산·민심의 안정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행위” 등으로 정의되는 간접침략은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결정 공포한 ‘간접침략을 분쇄하자.’는 혁명구호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혁명구호는 관공서나 은행 건물 입구 상단에 부착되어 있어, 그 건물을 배경으로 촬영한 단체기념사진에서 자주 목격되곤 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러한 반공 관련 정치 구호나 표어들은 오랫동안 관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특정 시대를 표상하는 집단기억의 하나로 남았다. 반공표어 중에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반공·방첩’이었다. 이 표어는 단순하지만 쉽게 각인되어 거리마다, 건물마다 심지어는 생활용품이나 학용품 등에도 일상의 풍경처럼 쓰였다. 이처럼 반공표어가 홍수를 이루자, 1964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반공이나 방첩이 벽보나 표어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시내의 담벼락에 붉은 뺑끼(페인트)로 쓰여져가는 반공과 방첩이라는 표어와 그리고 극장, 학교, 기업체에 강매되고 있다는 반공·방첩의 표어판의 효과”에 대해 의문시하는 비판적 기사가 실렸다. 나아가 반공·방첩 표어판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시각공해로 받아들여졌다. 반공이 일상화되면서 그 경계심은 사라지고, ‘반공’(이라는 표어가 야기한 시각공해)을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반공아카이브’는 학교생활과 일상생활 공간 속에 써져있거나 부착된 ‘반공·방첩’ 표어를 중심으로 1960~70년대 대국민 선전 구호와 이념 구호 등을 모은 것이다. 아무래도 반공교육의 효과는 학생들에게 가장 크게 미치기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그러한 구호를 많이 보게 되며, 반공 교육 교재와 서적들이 다수 발행되었다.

아카이브 5. 동상과 기념 사이 (여가사진아카이브)

박정희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현대적인 의미의 여가문화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에 힘입어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실내에 머물러 있던 여가활동이 야외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가깝게는 도시의 고궁, 공원, 강변, 근교 등으로 나들이를 떠났고, 멀게는 산과 바다 그리고 휴양지나 지역 명소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는 기념사진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일반적으로 통과의례와 관련해서 촬영되었던 기념사진이 여가장소에서의 기념사진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특히 가족 단위의 야외 나들이와 여행이 본격화되고 카메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가족사진 앨범에는 나들이사진과 여행사진이 양적으로 증가되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수많은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기념사진의 풍경도 바뀌었다. 나들이 및 여행 기념사진은 그곳이 어디인지 장소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보여준다. 다수의 관광객이 동일한 장소를 찾고 기념사진을 남기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장소의 신성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광 또는 여행사진은 ‘그곳에 갔다 왔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장소에 대한 상징적 소유 욕망’의 표출이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배경)에 동상이 등장하게 되면서, 기념사진이 갖는 장소성의 문제는 동상의 모델인 역사적 인물과의 연관성의 문제로 대체된다.
물론 동상이 세워진 곳의 위치가 기념사진의 장소성을 보장해주며, 그것은 동상의 주인공과 함께 유의미한 요소로 살아남는다. 따라서 기념사진 속 동상은 그것이 건립된 지역의 랜드 마크로서 기능하며, 역설적으로 장소성을 보장해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장소성은 동상이 갖는 시대적 상징성에 가려져서 부착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또한 그 동상의 위치가 역사적 맥락을 잃었을 때, 즉 위치 선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오히려 동상 건립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결국 동상이 세워진 곳의 장소성은 기념사진의 장소성이 갖는 사회학적 의미보다는 대상 종속적인 요소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여가사진아카이브’는 동상을 배경으로 촬영한 개인 및 단체 기념사진을 모은 것이다. 수집된 기념사진 중에서 이순신 동상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이 가장 많았고, 맥아더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 이순신 동상은 1950년대 들어와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는 1952년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한 진해의 동상과 1955년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한 부산 용두산공원의 동상이 있다. 그 뒤를 이어 세종로를 비롯해서 아산 신정호, 목포 유달산,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진도 울돌목, 통영 남망산조각공원 등 전국 각지에 이순신동상이 건립되었다. 1968년 세종로에 세워진 이순신동상은 1966년 조직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 건립한 제1호 위인 동상(헌납자 박정희 대통령)으로 김세중이 제작을 맡았다. 이 위원회에서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총 15개의 애국선열 기념동상을 제작했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이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 민족담론과 전통담론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기획된 문화정치의 하나였다.

아카이브 6. 새나라새마을새살림 (새것아카이브)

압축 근대를 살아온 우리들 의식 속엔 늘 ‘새것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 개항이후 서양을 모델로 서양인들이 밟아온 근대(성)를 지향점으로 국가시스템과 국민의 의식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 특히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전개됐던 박정희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도 ‘새것 콤플렉스’가 의식 전면에서 작동했다. 1960년대 중반 근대화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사회 전 분야에서 기존의 것을 모두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개조 작업이 일어났으며, 박정희 체제에 저항했던 엘리트들도 근대화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양한 근대화 주체들은 나라도, 마을도, 농촌도, 농민도, 마음도, 교육도, 교실도, 인물도, 가정도, 살림도 모두 다 바꾸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새것 콤플렉스는 각종 서적이나 잡지, 홍보물의 제호를 통해 발현되었는데, 제호 앞에 ‘새’자를 붙인 잡지나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박정희 시대에 붐을 이루었다.
1961년 8월 공보부에서는 새나라사를 앞세워 정부기관지인 『주간 새나라』를 발간했는데, “국민에게 혁명과업의 완수와 아울러 혁명정신의 철저를 시키기 위해서 그 선전지로 내놓는 것”(『동아일보, 1961.8.10.)이었다. 또한 1962년 3월에는 『주간 새나라』의 부록으로 농촌문고를 발행했으며, 이 책 역시 공보부가 매주 20만부씩 찍어 농어촌에 무료로 배부했던 일종의 정부 정책 해설서였다. 제1집 『보다 잘 살게 되는 길』을 시작으로 제2집 『살아있는 상록수』, 제9집 『반공의 횃불』, 제13집 『새나라의 건설』, 제15집 『혁명의 발자취』 등을 발간했다. 1964년 『주간 새나라』를 인수한 대한공론사는 『새나라 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다가, 1968년 화보잡지 『새나라』로, 1972년 다시 『새마을』(1974년 5월 월간종합지로 재창간)로 제호를 변경하여 관변 매체로 활용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초기 근대화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농업과 농촌에 관한 정책과 담론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농촌 및 농업 근대화 정책을 전개하면서 그 홍보를 위해 일찍이 농촌 관련 잡지를 발행했는데, 1961년 10월 농협중앙회에서 발행한 『새농민』은 대표적인 관제 농촌잡지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56년 중앙종묘주식회사에서 계간으로 창간해 발간해오다 1968년부터 월간으로 전환한 농업정보지인 『새농사』라는 잡지가 있었으며, 1958년 미국 공보원이 창간하여 1964년까지 발행한 『새힘』도 있었다. 특히 1964년까지 발간된 『새힘』의 부제는 ‘농촌사람들을 위한 잡지’로, 발간 당시 35만부를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할 정도로 미국공보원에서 나온 출판물 중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잡지였다. 이 잡지는 농업 정보 외에 미국 원조, 미국의 발전상, 반공 및 민주주의 관련 기사를 실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새힘』과 함께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펴낸 『새교육』(1948년 창간)과 『새교실』(1949년 창간), 1954년 1월 새가정사에서 발행한 기독교 잡지인 『새가정』 등 1961년 이전에 창간되어 박정희 시대까지 발행된 잡지들을 보면 ‘새것 콤플렉스’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1964년 새소년사에서 창간한 『새소년』, 1965년 새마음사에서 펴낸 『새마음』, 1966년 여성종합잡지인 『여원』(여원사)의 별책부록으로 발행된 『새살림 연구』, 1967년 부산의 새시대사에서 발간한 『새시대』, 1972년 1월 서울특별시에서 창간한 『새인물』,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19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에서 펴낸 『새마음』, 1979년 9월 새마음봉사단에서 창간한 『새시대』 등 다양한 발행처에서 발간된 ‘새’ 잡지들을 통해 저마다의 근대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발족한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국민체육과 건강증진을 목적으로 제정·보급한 ‘재건체조’라는 것이 있었다. 재건체조는 이후 신세기체조, 새마을체조, 국민체조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박정희 시대 내내 보급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1962년 국민무용제정위원회에서는 국민의 건전한 체위 향상과 정서 관념의 순화운동의 일환으로 ‘국민무용’을 제정·보급했다. 이 사업을 새무용보급위원회와 한국교육무용총연합회에서 인계받아 ‘새무용’이란 이름으로 교사들에게 강습을 하고 그들로 하여금 국민들에게 보급케 하였다. 여기에는 마스게임과 국민무용, 생활무용, 중간놀이 등이 포함되었다. 이 새무용을 위해 많은 곡들이 만들어졌으며, 음반으로 제작되었다. 1972년 지구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새무용>(제8,9,10집)은 마스게임과 국민무용을 위한 곡집(曲集)인데, 문교부 교육과정에 의거한 무용 강습 교재로 만든 시리즈 음반 중 하나이다. 국민체조와 더불어 새무용은 국민적 일체감과 사회적 통합을 위한 훈육기제로 작동했다.

아카이브 7. 새농민·표상, 새농민표·상 (표지사진아카이브)

‘표지사진아카이브’는 농협중앙회에서 1961년 10월 창간한 농촌잡지인 『새농민』의 표지사진을 모은 것이다. 이 잡지는 1954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에서 발행한 『새농민』의 제호와 표지디자인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화가 우경희가 그린 삽화를 표지에 실었으나 1964년부터 사진으로 대체하였다. 표지사진은 주로 사진가 허종태(아리랑사 사진부장)가 맡았으며, 김한용(상업사진가), 박창희(경향신문 사진기자), 이안순(서울신문 사진기자) 등의 사진가들이 참여했다. 사진잡지를 예외로 한다면 대중잡지 표지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아리랑』(1955.3, 삼중당/아리랑사), 『명랑』(1956.1, 신태양사), 『여원』(1955.10, 학원사/여원사) 등의 대중잡지들이 인기 연예인들을 모델로 하여 표지사진을 촬영했다. 대중잡지 표지는 관행적으로 주로 화가들의 그림이나 삽화가 실렸는데, 이 시기에 들어와서 사진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은 한국시각문화사에서 있어서 사진 미디어의 위상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준다. 즉 사진은 재현의 수월성과 직접성, 정보전달의 신속성과 정확성 등의 매체적 속성을 기반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에 있어서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물론 원색인쇄술의 불안정성이 이러한 변화에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1960년대 초반에 이르면 사진 색분해라는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면서 급전하게 된다. 이제 대중잡지뿐만 아니라 일반 잡지에서도 사진을 표지에 싣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인쇄기술의 발달과 사진 미디어의 부상으로 인해 사진가들은 아마추어 사진 활동을 넘어 상업사진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1960년대 중후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의 성과에 힘입어 광고사진 영역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66년 8월 『사진예술』과 『포토그라피』라는 제호의 사진잡지가 동시에 창간되었으며, 1968년 3월에는 한국상업사진가협회가 발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1960년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상업사진가들이 탄생되었지만 그동안 한국사진계는 상업사진의 역사나 그 활동들에 대해서 침묵해왔다. 예술사진 위주의 담론이 만든 자기 기만행위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대중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다양한 출신의 사진가들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며, 『새농민』은 이러한 연구를 위해 살펴봐야할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사실 『새농민』은 농촌 근대화 운동과 담론 생산을 위해 발행한 관제 잡지로, 1999년 1월부터는 『행복의 샘』과 통합해 『전원생활』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농촌잡지를 통해 농촌의 영웅적 지도자 상(像)인 ‘새농민’ 상(像)을 표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새농민』에서는 농촌 지도자 상과는 무관하게, 유명 여성 연예인을 촬영한 사진으로 표지를 꾸몄다. 많은 농촌의 독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투고를 하자, 편집진에서는 대중성을 표방한 잡지의 성격상 특정인만을 위해서 아니라 온 가족 모두 같이 읽고 즐길 수 있도록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델을 등장시키고 있다고 변명하거나 안방의 주인인 가정주부를 상징하기 위해 여성 모델을 쓰고 있으며 농업 관계자들을 모델로 쓸 때 얼굴 표정이 굳어지기 때문에 세련된 마스크의 모델을 쓸 수밖에 없다는 등의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러한 담론과 표상의 불일치는 "도시 중심의 근대화가 추진되는 가운데 농촌 근대화가 지배적인 담론으로 제기되고 있었던 1960년대 당시의 독특한 모순적 현실을 반영한 결과"1)라고 볼 수 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국정지표나 시정목표를 국민들에게 선전, 홍보하기 위해 각 단위마다 다양한 사진표상들을 만들어냈으며, 여기에 사진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에 제작된 사진표상들을 읽을 때 그 사진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표상의 정치학을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진들은 결국 사진가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사진가들 사이의 표상 방식의 차이(미적 감수성, 사진기법, 시선, 태도 등)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비평과 사진사의 외연을 넓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1) 정홍섭, 「1960년대 농촌근대화 담론과 농촌/도시소설」, 2009, 139쪽

아카이브 8. 새마을주택 모델하우스 (농촌표준주택아카이브)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로 인해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 중의 하나는 농촌의 주택과 마을의 모습이었다. 특히 1970년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시작된 농촌주택개량사업은 농촌경관에 급진적인 변모를 가져왔다. 이 사업은 첫째 농촌의 보편적인 주택 유형인 초가집을 기와, 슬레이트, 함석지붕으로 바꾸는 지붕개량사업(1971년 시행)을 시작으로, 둘째 주택 보수와 농촌주택 건설을 위한 불량주택개량사업(1976년 시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전체의 구조를 바꾸면서 주택을 표준주택으로 개량하는 취락구조개선사업(1977년 시행) 등 3개의 세부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농촌표준주택설계도를 제작해서 무료로 보급했는데, 일명 새마을주택 또는 새마을농촌주택으로 불렸던 농촌표준주택의 설계도는 1971년 연두순시 때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에는 9평, 12평, 15평, 20평 등 모두 4개 평형 20종의 설계도가 제작되었으며, 1972년에는 10평, 12평, 15평, 18평, 20평형 등 모두 5개 평형 15종의 설계도가 무료 배표되었다. 이 설계도는 지금도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귀농·귀촌인의 빠른 정착을 위해 농촌에 특화한 32종의 설계도면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새마을주택의 설계도는 1978년에 완성된 것으로 15평, 18평, 20평, 25평 등 모두 4개 평형 12종으로 이루어졌다. 이 설계도에는 평형별 조감도와 평면도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에 따른 지붕과 벽체의 배색’을 예시하고 있는데, 오늘날 농촌주택의 지붕과 벽체의 색채가 지역마다 비슷한 색채를 띠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표준설계도는 남한 농촌의 전통주택을 근대적인 새마을주택으로 표준화함으로써 농촌마을마다 간직하고 있던 지역색(local color)을 잃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농촌경관의 ‘로컬 컬러’가 ‘새마을 컬러’로 바뀌면서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주택개량사업은 주로 도로변의 농촌마을을 중심으로 실시되어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우리나라 농촌경관의 변화뿐만 아니라 풍경사진사에 있어서도 그 이전 풍경사진과의 단절을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며, 정치적 풍경의 등장을 알린 첫 신호탄이었다.

아카이브 9. [동영상]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근대화 아카이브)

<테이프 커팅과 새마을 가꾸기>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추진된 근대화 프로젝트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이나 결과를 보여주는 대신 그것을 위해 추진한 각종 사업의 기념의례에 주목했다. 근대화 프로젝트의 모든 사업들은 ‘테이프 커팅’과 ‘발파 스위치 누르기’ 또는 ‘기념식수’ 등의 기념행사로 그 시작을 알렸는데, 이 행사의 주인공인 대통령 박정희를 중심으로 수많은 기념사진들이 생산되었다. 이와 함께 1970년 농촌 근대화 운동을 시작으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 전개된 새마을운동의 현장 사진들이 다수 남아있는데, 이 두 부류의 사진들은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들이다.
이 사진들은 박정희 시대의 공식기록과 공식기억으로 남아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내는 데 일조해왔다. 물론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지지율은 근대화의 역군으로 참여한/동원된 국민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반공교육의 내면화가 가져온 효과이자, 정치 현실과 경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신에서 비롯된 반사 심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 향수’로 설명되는 이러한 집단기억은 "현재의 관점이나 필요에 따라 과거를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동후, 2003, 74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이라는 대중매체에 의해 공식기억이 어떻게 매개되고 우리 안에 각인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여기서 기념의례와 같은 행사 사진과 새마을운동 사진에 주목한 것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집단기억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니라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들 중 사회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공식기억”(김형곤, 2007, 195쪽)에 맞서는 대항기억을 고민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두 부류의 기념사진과 기록사진들을 서로 교차 편집하여 동영상으로 제작했는데, 서로 다른 내용의 두 사진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몽타주 효과를 기대해본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