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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옥바라지
전시기간 2016. 12. 1 ~ 12. 31 - 쉬는 날 없음
전시장소 책방이음&갤러리
갤러리 주소 서울 종로구 대학로 14길 12-1 (혜화역 1번 출구 방향)
작가 홈페이지 http://torirun.blog.me
갤러리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eumartbook
관람시간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 오후 1시 ~ 7시,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 오전 11시 ~ 오후 10시
사진집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355310
옥바라지 골목은 십수년전 버스를 탄 채로 지나면서 본 것이 고작일 뿐 실제로 가 본적은 없는 곳이였다. 2016년 초, 옥바라지 골목이 완전히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글을 SNS로 접하게 되었고 관련대책 여러가지가 계획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중에는 사진전도 기획되고 있으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일정문제로 참여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옥바라지 골목을 처음으로 보게 된 건 구본장 여관 철거 위기라는 단체문자를 본 다음날 새벽4시였다. 내가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용역이 들이 닥쳤고, 사람들은 쫓겨났다.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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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1. 박김형준 작가의 아홉번째 개인전 ‘옥바라지’가 ‘책방이음&갤러리’에서 열립니다.
2. ‘옥바라지’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이 전시는 옥바라지 골목 개발 과정에서 개발을 밀어붙이려 하는 물리력과 이를 막으려는 행동 그리고 옥바라지에서 매주 기도회를 연 ‘옥바라지 선교센터’의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3. 이 전시는 12월 1일(목)을 시작으로 (오프닝은 12월 1일(목) 저녁7시) 12월 31일(일)까지 진행됩니다.
4. 보도자료에는 작업노트와 리슨투더시티 ‘박은선’님의 글, 옥바라지선교센터 이종건 센터장의 글이 첨부되어있습니다.
5. 또한 전시회와 동시에 ‘옥바라지’ 책자(스냅사진출사)가 함께 출간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355310 )
1.
옥바라지 골목은 십수년전 버스를 탄 채로 지나면서 본 것이 고작일 뿐 실제로 가 본적은 없는 곳이였다.
2016년 초, 옥바라지 골목이 완전히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는 글을 SNS로 접하게 되었고 관련대책 여러가지가 계획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중에는 사진전도 기획되고 있으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일정문제로 참여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옥바라지 골목을 처음으로 보게 된 건 구본장 여관 철거 위기라는 단체문자를 본 다음날 새벽4시였다. 내가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용역이 들이 닥쳤고, 사람들은 쫓겨났다.

2.
옥바라지 선교센터가 생겨 기도회를 시작했다는 내용을 SNS를 통해 접했다. 매주 수요일 옥바자리를 지키기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난 수요일마다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 좁은 길에서 왜 이걸 하느냐', '소란스럽게 무엇하는 짓이냐' 라는 말이 기도회 천막 안팍으로 울려 퍼졌지만, 선교센터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구본장 여관 이길자 사장님과 기도를 했다.

3.
서울은 끝없는 재개발로 몸살을 앓는다. 미관과 효율을 말하는 커다란 목소리에 쫓겨다니는 주민들의 모습 또한 여전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점점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당연하게도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의견도 충분히 경청하고 수렴할 수 있어야만 난개발을 막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나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난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사진, 글 박김형준

"크레인이 올라간다!"
2016.05.17 오전 7시09분. 크레인이 올랐다

건물 바깥을 돌며 사진을 찍으니, 이미 구본장 여관으로 들어가는 두군데 입구는 봉쇄되었다. 독립문 앞 고가도로 아래 크레인 두 대가 사라졌다.
"크레인이 올라간다!"
소리와 함께 공사장 안에서 크레인 소리가 들렸다.
"철근 가져와!"
용역 한명이 크레인 위에 올랐다. 구본장 여관 1층엔 소화기가 분사되고, 뿌연 연기로 꽉차있다. 크레인이 올라간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용산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크레인은 옥상이 아닌 3층으로 이동했고, 철근 막대기를 든 용역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창문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 다쳐! 거기, 사람 죽이지마!"
절규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다 부쉈는지, 아랫층에 있던 용역이 우르르 올라가, 옥상 꼭대기 방송 장비를 멈춘다. 용역은 뺏은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역의 장난스런 말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동시에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맘속으로 되뇌였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심하게 다쳤다. 셔터만 눌렀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나도 가슴이 쿵쾅쿵쾅하고 떨렸는데 소화기를 맞으며, 용역들의 물리력에 내동댕이 쳐진, 그리고 그 현장을 바로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다쳤을까? 여전히 용산은 진행중이다. 또다시 용산은 사람들의 마음에 박혔다.
박김형준 Hyungjoon ParkKim

상명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디지털이미지학과 석사과정 졸업,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디지털이미지학과 박사과정 재학

새로운 것을 위해 이전의 것이 어떻게 바뀌고 사라져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 보니, 10여년 동안 ‘개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사진교육에 관심이 많아져,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사진기를 통해 세상 보는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과 꾸준히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기록하는 데에 흥미를 느껴 몇 번의 스마트폰 사진전도 열었다. .

개인전
2016 옥바라지 - 책방이음&갤러리
2016 A Crack_틈 - 이정아 갤러리
2015 투영_A Window of A Bus - 이정아 갤러리
2014 화마_포이동 재건마을 이야기 - 오픈갤러리 아지트
2014 Improvisation - 문래예술공장 3층 포켓갤러리
2014 행궁동.네 - 대안공간 눈
2014 두리반. 발칙한 농성장 531일간의 기록 - 책방이음&갤러리
2012 A Wall - 가빈 갤러리
2009 포이동266번지 -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센터 갤러리 I관

기획전
2014 '서울의 인권을 여행하다' 서울인권콘서트 - 서울 시민청
2014 산드래미, 담다 - 매탄4동 주민센터 산드래미 갤러리

단체/그룹전
2016 길 위의 오산 - 꿈두레도서관 / 오매갤러리
2015 "안녕하세요!" 서수원 지역연구 아카이브 전시 - 커뮤니티 스튜디오 104
2015 동네야놀자 전 - 수원시미술전시관 2전시실
2015 수원 화성을 걷고 기록하다 2015 - 행궁동 커뮤니티아트센터 2층
2015 '기록' 展_기억의 잔향 - 이정아 갤러리
2015 경기문화예술신문 기획전 - 나눔 전 - 대안공간 눈
2015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 416기억전시관
2015 세월호,304인의작가가다가서다 ‘망각에저항하기’ - 안산문화예술의전당 1․2전시실
2015 내가 일기를 쓰는 까닭_<한국사진교육학회> 제1회 회원전 - 충무로 이룸 갤러리
2014 "Photo Diary" International Instragram Exhibition Part II - 갤러리 뭉클
2014 휴먼스 오브 월드 국제 사진전_Humans of Cities - 수원화성홍보관 기획전시실
2014 수원 화성을 걷고 기록하다_수.화.기 그룹전 - 행궁마을 커뮤니티아트센터 전시장
2014 "시간의 기억" 2nd 상명포토페어_상명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비주얼저널리즘전공 동문전 -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센터 갤러리
2012 골목잡지 '사이다' 여름호 발행 기념 전시 - 나남 갤러리
2009 '문래동사람들' - '춤공장' / '포토텔링'
2008 원더 스페이스 The Opening Exhibition - '사이갤러리'
2008 물레아트페스티벌 2008 전시#2 _ '불안' 사진전 - '춤공장'
2008 행궁가는 길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 '한데웃다' 사진전 - 갤러리 '한데우물'
2008 18대 국회의원 선거 사진전 -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센터 갤러리 I, II관
2007 대통령 선거 '국민의 선택' 사진전 - 상명대학교 예술디자인센터 갤러리 I, II관
2007 갤러리현 기획초대전 '풍경보다 낯선' : 갤러리 현

Facebook http://www.facebook.com/parkkimhyungjoon
Blog http://torirun.blog.me
옥바라지 골목, 지워진 역사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


1. 옥바라지 골목, 도시 재개발의 그늘
4대문 밖, 서대문형무소 앞 노동자 촌이자 옥바라지 골목으로 불리우던 마을이, 1930년 서울 여학생 학생만세운동의 주동자 최복순이 살던 골목이,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배경이 되던 마을이, 공산당재건사건 연류된 항일운동가들이 머물던 영천여관이 있던 골목이 롯데캐슬 아파트 네 동을 세우기 위해 사라졌다.

<옥바라지골목 보존 대책위>에서는 이 마을의 역사가 일방적으로 지워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대책위에서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서울시와 공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와 건설사 재개발 조합은 이 사업은 적법한 사업이고, 역사적 가치가 없으므로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결국 마을에 대한 시의 실질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2016년 4월1일 전면철거가 시작되었다. 거의 한달만에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올해 5월 17일에는 결국 옥바라지 골목 마지막 여관인 구본장여관에 강제집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재개발 조합이 불법 고용한 용역 깡패 100명이 동원된 강제집행은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집행은 물건에 대한 집행이지 사람에 대한 집행이 아니다. 그러나 용역깡패들은 소화기를 사람얼굴에 뿌리고, 쇠파이프로 유리창을 깨는 등 해서는 안될 폭력행위를 버젓이 했고, 삶터를 잃은 구본장 가족들, 구본장에 연대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과 예술가들은 몸과 마음을 다쳤다. 강제 집행 소식을 접하고 현장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이 공사는 없습니다. 내가 소송 당해도 좋아요" 라고 선언하였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왜냐하면 이 마을의 아파트 계획이 취소되고,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바램과 달랐다. 공사가 멈춘 후 <옥바라지 골목 보존 대책위>측은 이 마을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아직 철거 되지 않은 건물만이라도 남겨 그곳에 원주민이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재개발조합(시공사 롯데건설)은 8월 21일에 마지막 남은 1920-30년대 한옥 건물을 일방적으로 철거를 강행했으며, 서울시와 재개발 조합은 주민들이 반드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까지 폭력적 재개발에 저항하던 두 가구는 용역폭력과 재개발 조합의 협박 때문에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고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네로 이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근처 동네의 전세집 조차 얻기 힘들고, 다시 근처에서 장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재개발은 대체 누구를 위한 사업인가?

2. 학생만세운동, 공산당재건사건의 마을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지 못한데는 서울시의 책임도 크다. 애초에 가난한 동네라 별로 문화재라 할 만 한게 없고, 대부분 일본식 한옥이라 조사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였다. 서울시가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동안 조합은 일부러 오래된 한옥 건물들부터 철거했다. 옥바라지 골목, 즉 현저동 일대는 비단 옥바라지를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노동자들 등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성 밖 마을이었다. ‘1930년 여학생 만세운동 주모자’ 최복순 하숙집터와 사회주의 계열 항일 운동가들이 묵었던 영천여관이 있던 100여년 된 동네였다. 또 인혁당 사건의 피해 유족들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골목이다. 그 집들은 올해 4월1일까지만 해도 대부분 보존되어 있었다.
1930년 학생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화여자보통고등학교 4학년 최복순, 같은 학교 조숙현, 휘문고 만세운동 가담자 심홍근, 만세운동으로 인해 퇴학을 당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홍병모의 집 모두 현저동45번지 였다. 이뿐만 아니라 광주 서울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신간회 간사 한봉석의 집, 광주학생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른 차재정의 집, 글벗두레를 조직하여 공주 만세 운동 및 휴교운동 배후로 지목되었던 정룡산도 현저동 45-47(현 유성장)에 거주하였다. 조선공산당과 연루된 항일 운동가들이 주로 묵었던 영천여관도 불과 4월1일만 해도 남아있었다. 그간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계열 운동과, 193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연구와 조망이 부족한 상황에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마을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장소이다. 박완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감옥소 앞 마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의 무대가 되는 마을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물리적 증거가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

3. 아파트 공화국
이 모든 비극은 아파트 개발에 모든 특권과 특혜를 준 국가와 법, 그리고 부동산 투기에 눈이 먼 사회의 욕망 때문이다. 아파트 재개발 사업은 도시정비법에 공공사업이라고 명시 되어 있으나, 공공성은 찾아 보기 힘들다. 서울시의 경우 원주민 재정착률은 재개발10%, 뉴타운 8∼15%('08년, 시정연)밖에 되지 않는다. 공공사업이라 하면 국가나 시가 주도해야 하지만 재개발 사업의 주체는 “재개발 조합”이다. 즉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추진하므로, 개발 사업이 역사,문화,생태를 위협한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책임질 필요가 없다. 옥바라지 골목 재개발은 재개발사업을 주도하는 조합과 건설사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악 2구역의 경우 재개발 조합이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심지어 그런 주장을 하는 주민들을 인신 공격하였다. 그리고 서울시가 재개발 조합과 롯데건설에 남겨달라고 권고한 건물들부터 고의적으로 부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들은 아직 강제집행정지 항소 중이었던 구본장 여관에 용역 깡패 100명을 임의로 고용하여, 연대 온 시민들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내쫓았다. 이들은 현재 경비업법 위반으로 현재 검찰 조사중이지만 앞으로 이러한 폭력적 집행을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제가 필요하다.

4. 옥바라지의 연대 정신은 지금부터.
옥바라지 골목은 비록 허물어졌으나 시민들과 대책위는 계속 이 가난한 동네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옥바라지 골목 보존 운동의 성과를 크게 두가지로 본다면 첫째, 주민과 시민들이 직접 지역의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고 지키려고 투쟁한 것, 다른 하나는 폭력적 재개발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서울시가 시정하도록 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서울시는 "정비구역 전수조사를 통한 역사문화유산 보존 및 멸실 논란 사전 차단", "무악2구역 진행과정 기록 백서 제작" "정비사업의 강제철거 문제에 근본적 해결" 등을 마련하겠다 발표했다. 현재 옥바라지 골목은 거의 다 헐리고 물리적 흔적은 남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쫓겨나지 않고 그 마을에 살게 해달라는 간절한 요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국에서 한국전쟁 이전의 건축물이 3%가 채 안 되는 현실에서 도시 서민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남은 오래된 동네를 한켠이라도 지키지 못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옥바라지의 정신은 감옥에 갇힌자를 살리기 위한 감옥 밖 연대의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깡패들에게 돈 몇푼만 쥐어주면 사람을 쉽게 내쫓을 수 있다는 것을 옥바라지에서, 우장창창에서, 아현포차에서 보았다. 이것이 창살없는 감옥이 아니고 무엇일까? 시민들은 롯데건설이라는 대형 건설사와의 싸움에서 고통받는 주민들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이제 시작이다. 물리적 공간이 사라진 현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의미화 해야하는가. 도시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치열하게 물어야한다. 도시의 권리란 응당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 가치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다듬었습니다.>

---

이종건 (옥바라지 선교센터)

옥바라지 골목에서의 투쟁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 자국의 이름이 장난처럼 부르기 시작했던 ‘옥바라지 선교센터’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십오분 거리, 조금 낯 간지럽게 얘기하자면 우리 선배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그들을 옥바라지 해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던 무악제 2구역 ‘옥바라지 골목’에서 우리는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기도회는 아직 골목이 펜스에 막히기 전, 폭풍전야와도 같았던 고요한 여관의 좁은 골목에서 드려졌습니다. 비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신학생들과, 기독교인들, 그리고 주민과 활동가- 굳이 손을 잡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첫 기도회 후, 옥바라지 선교센터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없었습니다. 용역을 동원한 폭력집행으로 사람이 집기처럼 끌려 나온 5.17일- 우리는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301호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살 요량으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왔습니다. 옥상에서의 공연도, 담배연기 자욱한 옆방과 지지하는 마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나날들이 즐거웠습니다. 학교를 다녀오면 쓰레기통이 비워져 있고, 흰색에 파란색 글씨로 ‘구본장 여관’이라 박혀 있는 새 수건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비좁은 방에 신학생들이 옹기종기모여 작당모의를 했고, 공간을 활용할 여러 방안을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짐을 되찾게 되기까지 몇 개월 동안 온갖 물건과, 공간을 잃었습니다.

하물며 기껏 마련한 사업장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장님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5.17일, 도로에 드러누운 이길자 사장님을 앞에 두고 긴급 기도회를 했습니다. 기도회야 집회신고도 필요 없고, 준비된 것도 없으니 그저 성경책하나 들고, 찬송가 몇 곡 가지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간 친구들은 십자가를 들고 왔고, 성경책을 들고 왔습니다. 들고 온 십자가는 사개월간 천막을 지키며 우리가 없을 때도 주민들과 함께했습니다.

긴급기도회 때 문득 생각이 나서 함께 나눈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옥바라지 선교센터는 지금도 그 구절을 성구삼아 곳곳에 새겨 넣었습니다.

시편 118:22의 말씀입니다.
“건축가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수 시간 폭력상황에 놓인 활동가들과 주민들은 아스팔트에 널브러져 있었고, 꼭 버려진 돌 같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건축가’는 기득권을 의미합니다. 버려진 돌은 말 그대로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저 고백은 버려지고 밀려나고, 쫓겨난 주변부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머릿돌로 쓰신다는 겁니다. 건축가는 자신이 집을 짓는다고 착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머릿돌로 쓰십니다.

옥바라지 골목에서의 싸움은 이제 기억의 투쟁으로 여전히 진행 중 입니다만, 거리에서의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시작은 버려진 돌이었는데, 어느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그 머릿돌이 세워져 있는 튼튼한 건물을 각기 달리 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 부릅니다. 온갖 차별과 배제, 억압과 쫓겨남에 맞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머릿돌이 바로 옥바라지 골목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옥바라지 선교센터’ 또한 자리매김 했고, 이제는 마찬가지로 고난 받는 다른 철거현장들을 ‘옥바라지’하자 결의하고 함께 모여 계속 다음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현장에서의 한 달은 일 년처럼 흘러갔습니다. 그 시간들은 소중하기도, 버겁기도 했습니다. 그 기록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박김형준 작가는 지난 반 년의 시간- 거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이 투쟁을 기록했습니다. 옥바라지 선교센터는 그 사진들로 매 주 기도회 웹자보를 만들곤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사진들은 옥바라지 선교센터와 이 투쟁을 함께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박김형준 작가의 카메라 시선이 닿는 곳 대부분에 기독교인들이 함께 했고,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짧은 글을 쓰며 작가님의 사진으로 만들었던 웹자보들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서린 이야기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기록에 부끄럽지 않게 투쟁하자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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