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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00:01

김지연 Jee Yo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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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삼천원의 식사
전시기간 2016. 11. 22 ~ 12. 29
전시장소 서울시 NPO 지원센터 1층
오프닝 2016. 11. 24(목) 6시PM
갤러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9길 39 부림빌딩 1,2층(02-734-1109)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seoulnpocenter.kr
삼천 원짜리 국수장사를 30년을 해온 사람이나 한 끼 식사를 삼천 원 주고 먹는 사람에게나 삼천 원은 절대 수치인 것이다. 삼천 원을 받아서 떼돈 벌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을 것이며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삼천 원을 주고 사먹는 식사는 허기를 면해주고 나름 서민생활의 구수한 정취를 느끼게 하지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정찬에서 즐기는 스스로를 만족하게 하는 인생의 성취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 할 것이다. 천원어치 붕어빵을 사면서, 혹은 이천 원짜리 두부 한 모를 사면서 그들에게 모델을 서 줄 것을 간청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장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때로는 뜨거운 국 사발을 나르는 늙은 주인장 앞에서 단 2초의 시간을 할애 받는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지체 할 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물이 식을까봐, 국수가 부르틀까봐 걱정을 한다. 나에게도 이런 단순하고 명료한 삶의 명분이 있을까? 어떤 장사꾼이든 장사를 취미나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의 생계를 걸고 매일매일 삶 속에서 투쟁을 한다.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의 표정 속에는 "참, 세상살이가 쉽지 않네요." 하는 것과 "이것 한 번 드셔 보세요"하는 것과 "아이고, 나 참, 쑥스럽네요."하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각기 다른 표정이라기보다 모든 장사하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가 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실 강진장날 머리에 보따리를 인 할머니를 만나 사진을 찍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겉보리와 옥수수를 이고 와서 뻥튀기를 하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저녁나절까지 어디서 기다려야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겨울의 시골 장터는 띄엄띄엄 장꾼들이 전을 열고 있지만 바람은 난전의 천막을 휘갈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밥을 사먹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애당초 점심값은 계획에 없는 듯했다. 나는 같이 국수나 사먹자고 권했다. 할머니는 처음 사양하더니 이네 보따리를 이고 따라왔다. 그이는 뜨거운 장터국수 국물을 마시며 “아, 맛있네!”하고 중얼거렸다. 양은 국수그릇을 움켜든 두 손은 손톱이 닳고 살결은 거칠었다. 삼원짜리 식사가 이런 것일 수도 있구나 하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번 작업은 우리 삶에서 쉽게 접근하는 서민생활의 기본적인 물가 단위가 얼마나 무겁거나 혹은 가벼운지, 지나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각인되어지는 숫자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현시점에서 체감하는 숫자는 세월이 지나면 어떤 무게로 기억 될지 알고 싶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서민들이 삶의 무게며 단위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지연
  • ⓒ김지연 Jee Youn Kim
  • ⓒ김지연 Jee Youn Kim
    김치수제비 3,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꼬막1되 10,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돼지고기 한근 6,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두부한모 2,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막걸리한병 2,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백양국수1단 5,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장터국수 3,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찐빵6개 2,000원
  • ⓒ김지연 Jee Youn Kim
    콩나물국밥 4,000원
삼천원의 식사

삼천 원짜리 국수장사를 30년을 해온 사람이나 한 끼 식사를 삼천 원 주고 먹는 사람에게나 삼천 원은 절대 수치인 것이다. 삼천 원을 받아서 떼돈 벌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을 것이며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삼천 원을 주고 사먹는 식사는 허기를 면해주고 나름 서민생활의 구수한 정취를 느끼게 하지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정찬에서 즐기는 스스로를 만족하게 하는 인생의 성취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 할 것이다. 천원어치 붕어빵을 사면서, 혹은 이천 원짜리 두부 한 모를 사면서 그들에게 모델을 서 줄 것을 간청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장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때로는 뜨거운 국 사발을 나르는 늙은 주인장 앞에서 단 2초의 시간을 할애 받는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지체 할 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물이 식을까봐, 국수가 부르틀까봐 걱정을 한다. 나에게도 이런 단순하고 명료한 삶의 명분이 있을까?
어떤 장사꾼이든 장사를 취미나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의 생계를 걸고 매일매일 삶 속에서 투쟁을 한다.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의 표정 속에는 "참, 세상살이가 쉽지 않네요." 하는 것과 "이것 한 번 드셔 보세요"하는 것과 "아이고, 나 참, 쑥스럽네요."하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각기 다른 표정이라기보다 모든 장사하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가 섞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실 강진장날 머리에 보따리를 인 할머니를 만나 사진을 찍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겉보리와 옥수수를 이고 와서 뻥튀기를 하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저녁나절까지 어디서 기다려야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겨울의 시골 장터는 띄엄띄엄 장꾼들이 전을 열고 있지만 바람은 난전의 천막을 휘갈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밥을 사먹을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애당초 점심값은 계획에 없는 듯했다. 나는 같이 국수나 사먹자고 권했다. 할머니는 처음 사양하더니 이네 보따리를 이고 따라왔다. 그이는 뜨거운 장터국수 국물을 마시며 “아, 맛있네!”하고 중얼거렸다. 양은 국수그릇을 움켜든 두 손은 손톱이 닳고 살결은 거칠었다. 삼원짜리 식사가 이런 것일 수도 있구나 하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번 작업은 우리 삶에서 쉽게 접근하는 서민생활의 기본적인 물가 단위가 얼마나 무겁거나 혹은 가벼운지, 지나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각인되어지는 숫자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현시점에서 체감하는 숫자는 세월이 지나면 어떤 무게로 기억 될지 알고 싶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서민들이 삶의 무게며 단위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지연
김지연 개인전: 사진의 과거, 두 가지 향수

진리는 평범한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1. 돼지고기 한 근, 꼬막 한 되, 두부 한 모, 막걸리 한 병, 백양국수 한 단, 장터국수, 조화, 찐빵 6개, 콩나물 국밥, 김치 수제비. 어느 한적한 시골 장터라면 어디서서 쉽게 볼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슴에 안아든 사람들 역시 비슷하다. 푸줏간 주인, 식당 주인, 국수집 사장 등, 성별과 나이는 달라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김지연이 그것과 그들을 찍어낸 방식도 그렇다. 특별하게 연출하지 않고서 평소의 모습을 그대로 찍는다. 일터를 배경으로 잡고 반신상과 전신상이 두루 존재한다. 딱히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체로 정면을 찍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별다른 형식적 공통점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면면을 평범한 시선으로 잡아낸 작업이다. 사진집 삼천원의 식사의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다. 김지연은 말한다. 서민의 삶의 무게를, ‘삼천원’으로 재고 싶었다고. 결국, 사진의 내용도 형식도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평범한 요소들이 합쳐지면, 상황은 완연히 달라진다. 그것은 사진을 둘러싼 시대의 맥락 때문이고, 오늘날 사람들이 사진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다.

2. 원래 사진은 찍는 것이었다. 있는 것들의 흔적을 남기며 있었던 것들의 흔적을 기념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디지털은 이 모든 것을 헝클어 놓았다. 물론, 지금도 원래의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종 ‘스마트’한 매체로 인증을 하면서 있는 것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 목적은 상당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만들기’ 때문이다. 회화처럼 물감을 쓰진 않지만, 이미지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에 불과하다. 물론, 회화와 비교하면 재료의 성격도 다르고 제작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다. 어쨌든 현실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볼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며, 여기서 사진의 본성은 변화된다. 사진은 이제껏 ‘과거’였다. 있는 것을 나중에 따라 잡는 것, 즉 모방Nach-Bildung이기 때문이다. 저 옛날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은 그래서 당연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었을 것이다.”(바쟁) 하지만 만드는 사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과거와 현재에 없는 것, 즉 모형Vor-Bild에 가깝다. 관계는 역전된다. 현실이 사진을 쫓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진의 근원적인 기능은 ‘손상’된 것은 당연하다.

3. 그렇게 본다면 사진의 지위는 몰락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저 옛날 사진가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탐험가였고, 사진기는 그들의 무기였다. 영웅담처럼 떠돌았던 사진가의 수많은 일생들을 생각해 보라. 진실을 담지하는 영웅적인 무기였던 것이 지금은 그저 그런 이미지자원을 보급하는 매체로 전락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대하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수많은 사회인맥서비스에 등장하는 ‘셀카’를 살펴보면 쉽게 드러난다. 셀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과 몸짓부터 다르다. 아니,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말처럼 본성부터 달라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사긴기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다. ‘피사체’라는 수동태 명사는 그들을 묘사하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꾸미며 연출하며, 자신을 스스로 찍는다. 셀카에서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통일되며, 그들은 신처럼 전능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제어하며 평범한 존재를 넘어서려 시도한다. 그리고 호흡하는 것처럼 사진을 스스로 제작하고 밥 먹는 것처럼 소비한다. 여기서 셀카의 순간은 무엇인가 사건이 압축된 계기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이어지는 시간의 계열 가운데 보기 좋은 것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마저 나중에 각종 필터와 편집프로그램을 통해서 가공되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외양만 갈취할 따름이며, 매체를 통해서 수없이 복제되어 증식한다. 그렇게 복제된 이미지들은 현실을 빽빽이 둘러싸며 그것의 흔적까지 위협할 태세까지 갖춘다. 현실과 마주했던 사진은 사이좋게 멀어지며 원래의 본성을 차분히 상실해 간다.

4. 김지연의 작업이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은 이 지점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녀의 작업은 내용도 형식도 평범하다. 원래의 사진의 본성에 충실하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녀의 사진은 ‘지금-여기’를 응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범’의 의미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즉 사진을 둘러싼 이미지의 새로운 국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우선 주체부터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조만간 사라질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범’ 하면 시장통 사람들을 떠올리는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시장은 대형마트 때문에 사라지는 추세며, 당연히 시장의 상인도 똑같은 운명이다. 그들은 디지털 네이티브처럼 자신의 존재를 ‘뽐내지’ 않으며 연출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옛날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긴장한 모습이다. 그들의 존재가 향수를 일으키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게다가 김지연이 활동하는 지역을 생각해 보라. 전주는 대도시지만, 그곳을 둘러싼 지역은 그렇지 못한 곳이 상당하며, 어쩌면 여전히 5일장이 서는 곳도 있을 것이다. 반짝이는 외관과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대형마트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5일장은 너무나 먼 곳이며, 자료사진에서나 우연치 않게 발견할 만한 곳이다. 그렇기에 주체도 장소도 어쩌면 이제는 ‘평범’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5.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작업형식이다. 김지연은 전통적 ‘스트레이트’ 형식에 따라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것은 과거의 사진이며, 오늘날 멸종동물처럼 보기 힘든 형식이다. 이른바 ‘스트레이트’의 소멸은 그러한 시선의 소멸까지 함축한다. 김지연의 작업은 소박한 형태로 여기에 맞선다. 물론 그녀가 탐험하는 세계가 큰 곳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험이 아닌 것은 아니다. 세계와 마주하며 부딪히며 의미를 찾는 성격을 똑같다. 이러한 그녀의 시선은 10여년 전 이발소 작업을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흔들림 없이 한 곳을 응시한다. 이러한 면모는 줄곧 계남 지역에서 <정미소>를 꾸준히 운영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방식을 띤다고 해도 응시하는 지점이 ‘지금-여기’라는 것이다.

6. 결국 김지연의 사진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의 형식까지 환기한다. 사진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인용하며 지나가는 사진이 아니라, 원래 그랬던 사진을, 지금은 망각된 사진을 소환한다. 사진의 본성을 건드리며, 진실을 담는다고 믿었던 매체를 향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기념하는 것은, 그리고 기념한다면, 담았던 소재가 아니라, 사진 자체일 것이다. 김상우
우리가 버린 것들을 그리움으로 기억하게 하리라
-사람들의 땀과 꿈 그리고 다정한 밥을 위하여


함께 숨 쉬며 마음을 나누던 소중한 존재들마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가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이 평범한 소멸의 일상까지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을 통해 문득 깨달았을 때, 우리들의 가슴은 얼마나 덜컥 내려앉고 마는가. 전혀 아름답지 않기를 작정하고 나선 듯한 김지연의 사진집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내 몸에서 나의 국과 밥이 얼마나 멀리 사라져버렸다가 겨우 겨우 길을 찾아 돌아오고 있는지를 아프도록 오래 경험해야만 했다. 아직은 우리 곁에 남아 있지만 점점 외곽으로 밀리면서 사라져 가는 ‘삼천 원의 식사’들. 매끼 끼니를 때우며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서 밥 먹는 일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고 잘라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늘 먹고자 꿈꾸는 밥이 더 이상 ‘삼천 원의 식사’는 아니며 그 밥을 먹으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또한 옛날과는 서로 다른 마음이리라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지연은 ‘삼천 원의 식사’를 데리고 먼 길을 돌아 우리에게 되짚어 오지 않았을까. 때로는 사골 떡만두국이나 소머리국밥, 어묵우동이나 김치수제비를 들고 오기도 하고, 팥죽을 끓이거나 국수를 삶아서 쟁반에 곱게 받쳐 들고 올 때도 있다. 삶은 국수가닥을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에 둘둘 말아서 입에 덥석 넣어주고는 어린 시절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뜨거운 것을 끓여내던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우리를 성큼 데려가기도 한다. 이러니, ‘삼천 원의 식사’는 꼭 삼천 원을 주고 사 먹을 수 있는 한 끼의 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꼬막 한 되 털신 한 켤레로 그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황석어젓 한 바가지나 나무줄기를 파들어 갈 목도장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에 이르면 ‘삼천 원의 식사’는 드디어 단순한 밥을 넘어서서 이제는 우리들에게 쫓겨 사라져가야 할 사람들의 애타는 땀과 소박한 꿈으로 그 의미망을 넓혀 가게 되는 것이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뒤틀린 손마디나 굵은 주름살을 통해 그들이 감당해 온 삶의 애환을 간간히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하지만 김지연은 그동안에도 늘 그래왔듯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고된 노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을 외곽으로 몰아붙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카메라의 저쪽 세계를 응시하며 나는 아직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결국 작가는 자본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땀과 밥과 꿈과 돈에 관한 소박한 기억들을 인간의 총체적인 그리움으로 살려내고 말겠다는 작정을 하고 있으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오늘의 땀과 밥과 꿈과 돈의 욕망들을 향해 솔직담백한 얼굴로 되묻고 있다. 도대체 얼마치의 꿈을 꾸기 위해 우리는 밥을 먹고 있으며 삼천 원은 어떤 가치와 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기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져가야 하는 가를. 그러나 작가는 그 자신이 그동안 천착해 온, ‘사라지는 것’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던 ‘민중들의 삶’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끝내 드러내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에만 열중하려고 애를 쓴다. 삶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이어진 인간의 그리움을 기억 안에서 살려내는 일이 행여 자신의 목소리로 인해 훼손될까봐 몹시 걱정하고 있는 사람처럼.
1980년대 중반이후 서울을 버리고 내려와 지역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인간의 삶에 대한 참된 지평을 가진 그들의 실천이 있었기에 이 지경에 이른 이 땅의 천박한 삶 속에서도 우리를 요만큼이라도 견뎌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들이 남긴 실천의 핵심은 사라져가는 공동체적 가치를 살려내서 과거와 현재를 소통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살아나 자존을 지켜나가게 된 작은 존재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하나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의 흔적조차도 별처럼 반짝일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김지연이 시도해 온 수많은 사진작업들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진을 처음 발견하던 순간 나는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그동안 공동체의 가치를 살려내고자 했던 대부분의 활동은 부문별 운동이나 지자체의 생활 정치를 통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사진가로서, 전시기획자로서, 아키비스트로서 보여준 김지연의 작업들은 사진공부를 통한 이론과 깨달음을 담담하게 실천해오는 과정을 반복해 냄으로써 개인 스스로 뿌리를 내려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집단적 사고의 도움 없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어가며 이루어 낸 한 사진작가의 지역적 성취는 반드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자비한 문명이라는 이름의 질주 앞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살려내기 위한 한 개인의 노력은 얼마나 가엾고 무모하면서도 또한 당당하고 아름다운가. 현장에 들어가 나 스스로 공동체가 되어 살며 그 자신이 그들의 아픔이 되어 있을 때야 비로소 시작이라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번에 만나는 사진집에는 이러한 그의 사상과 실천이 고루 관철되고 있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찍어내기까지 ‘삼천 원의 식사’를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게 문턱을 닳도록 넘어 다녔을 것이며 결국은 그들의 마음의 문까지 열고 들어가 찍어 낸 사진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가슴이 저려오지 않을 수 없다. 대상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 삶을 나누고 기다림 속에서 찍어 낸 사진 앞에서만 우리의 그리움은 온전히 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 순간에 다시 해본다.
김지연의 사진을 다가가기 위하여 ‘사라져버렸다’는 표현을 여러 번 쓰게 되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사라졌다’기보다는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했을 때 그들을 ‘떠나보냈거나 쫓아 보내려’ 했기에 우리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야 ‘삼천 원의 식사’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야만 겨우 무너지는 스스로의 양심을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러니 무엇인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우리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고 여겼기에 사라지는 존재들을 향해서 그동안 쉼 없이 슬픈 척 하지 않고 홀로 셔터를 눌러왔다. 그리움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 기록하고 저장하기 위한, 그의 남은 생애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또한 늘 그러하리고 믿는다.

김 영 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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