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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사진아카이브연구소 기획전시
전시기간 2014년 8월 27일(수) ~ 9월 20일(토)
전시장소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
갤러리 주소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 22층 (Tel 02-3469-0822)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space22.co.kr
space22.jpg


기생의 초상1900년.jpg

기생의 초상,

14.2x10.2cm,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전화 받는 포즈를 취한 남학생의 초상사진 금광당사진관 1920년대.jpg

김광배, 전화 받는 포즈의 남학생 사진, 금광당사진관,

9x6.1cm,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남학생의 초상사진 공주 문화사진관 1930년대.jpg

검정 외투의 남학생 초상, 충남 공주 문화사진관, 1920~30년대,

8.9×5.7cm(15.7×9.7cm),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남성 4명의 초상사진 개성 지전사진관 1931.jpg

4명의 남성 단체 초상, 이케다(池田)사진관, 1931

9.3x13.7cm,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여성초상1936.jpg

여성초상 1936


전시 기획의도
이번 전시는 초상사진을 통해 ‘사진관 시대’라고 칭해지는 1920~30년대 우리나라 사진문화의 한 양상을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개항 이후 사진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근대 조선인들은 ‘photography’의 번역어로 초상화를 부르던 이름 중의 하나였던 ‘사진’을 채택하였다. 이를 통해 ‘초상화=사진=초상사진’이라는 당대인들의 사진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데, 초상사진은 초상화를 대체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땅에 수용된 새로운 사진문화의 하나였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그동안 사진아카이브연구소에서 소장해온 근대 사진 자료 중 초상사진에 해당하는 아카이브로서, 《2013 서울사진축제》 제1부 ‘section 2. 사진관시대의 초상사진’에 출품되었던 사진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초상사진의 기원과 초상 개념의 변화 과정 그리고 초상사진의 외연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 확인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전시 서문
서구 근대 부르주아의 고안물인 사진술은 무엇보다도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초상이미지를 모든 계층들이 소유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견인했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1850년대에 들어서 콜로디온 습판이 개발되고 전업(專業) 초상사진사들이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초상사진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초상사진은 부르주아 계급들로 하여금 스스로 국민국가의 일원이자 근대적 주체라는 인식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초상사진이 대중화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물론 이런 연유에는 사진술의 주체적인 도입이 늦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883년 사진술 도입 이래 정착에 이르기까지 녹록치 못했던 여러 가지 사정이 더해졌다. 무엇보다도 1884년 급진개화파에 의해 주도된 갑신정변의 실패는 김용원, 황철, 지운영 등 사진술 도입의 선각자들이 어렵게 개설한 사진관의 파괴로 이루어졌으며, 결국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의 주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조선인 스스로 기록할 수 있는 사진 촬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의 기록도,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의 순간도 우리 손으로 남기지 못한 채 20세기를 맞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사진과 기념사진 시장은 일찍이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 사진사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시종(侍從)이었던 서화가 김규진에 의해 1907년 천연당사진관이 개설되면서 조선인에 의한 사진기록의 오랜 공백기는 마감되었으며, 이는 조선인 사진사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는 직업교육과정의 하나로 사진과를 신설하여 잠재적 사진사들을 다수 배출했으며,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인 사진관의 개설을 견인했다. 우리나라에서 초상사진의 대중화 시대는 1920년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들어와 사진관뿐만 아니라 사진교육기관 그리고 사진재료상 등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서울(경성) 지역 내에서 활동했던 사진관과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진관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전자의 경우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과 이곳의 사진기사로 있었던 김시련의 옥영당, 기생사진관으로 유명한 김광배의 금광당, 여성 사진사 이홍경과 그의 남편 채상묵이 공동으로 개설한 경성사진관 등 초상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조선인 사진관들을 중심으로 조명했으며, 경우에 따라 일본인 사진관에서 촬영한 초상사진들도 함께 전시하여 서울의 사진관 지형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조선인 사진관과 일본인 사진관 구별 없이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한 초상사진들을 모았는데, 이를 통해 초상사진의 대중화가 전국적인 현상이었음을 살펴보고자 했다. 나아가 고객의 절반이었던 여성과, 남/여 학생, 가족/부부 등 주제별로 초상사진을 구성하여 초상이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경민)

전시 내용
주요 사진관

천연당사진관
해강 김규진이 사진사 박주진의 도움을 받아 1907년 8월 원구단 근처 석정동(현 소공동) 자신의 집 후원에 세운 사진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오랫동안 조선인 사진사가 활동하지 못했던 공백 상황에서 천연당사진관의 개설은 본격적인 조선인 사진관을 등장을 알린 사진사적 사건이며, 1910년대 조선인 사진사들의 사진관 진출을 견인했다.

금광당사진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사진관으로 김광배에 의해 1920년 서린동에 개설되었다. 요릿집으로 유명한 명월관 소속 기생들이 프로필사진을 찍기 위해 인근에 있던 금광당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속칭 기생사진관으로도 불리었다. 김광배는 1926년 조선인 사진사들로 결성된 경성사진사협회의 회원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사진계의 원로로서 활동했다.

경성사진관
근대 초상화가 채용신의 셋째 아들 내외인 채상묵과 이홍경이 1925년경 인사동에 개설한 사진관이다. 1920년부터 채상묵은 부친인 채용신을 따라 직업 초상화가로서 활동하다가 초상사진가로 전업했으며, 이홍경은 남편보다 앞서 1921년 관철동에 부인사진관을 개설하여 여성사진사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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