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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항동 206번지
전시기간 2015. 2. 10 ~ 2. 15
전시장소 류가헌 Ryugaheon, Seoul
갤러리 주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 /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02-720-2010)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ryugaheon.com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206번지는 1966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꽃 농사를 짓던 곳이다. 아버지가 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면서 1971년 가을부터 이곳은 우리 가족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내 학창시절 추억의 대부분은 이곳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만들어졌다. ‘항동’은 부모님의 땀과 나의 꿈이 깃든 곳이다. 이곳에는 아버지께서 팔기 위해서 심은 달리아와 꽃생강을 비롯해서 언제부터인가 항동의 상징이 된 목련 등 갖가지 꽃들이 봄부터 늦가을까지 피고 졌다. 더구나 일부러 심지 않은 들꽃까지 피어나는 봄이면 ‘항동’ 밭은 말 그대로 꽃밭이 되었다.
  • ⓒ박종진 Park, Jongjin
  • ⓒ박종진 Park, Jongjin
  • ⓒ박종진 Park, Jongjin
  • ⓒ박종진 Park, Jong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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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진 Park, Jongjin
  • ⓒ박종진 Park, Jongjin
  • ⓒ박종진 Park, Jongjin
우리들 저마다의 ‘시절’이 중첩되어 있는 ‘항동 시절’

- 박종진 사진전 [항동206번지] 2월 10일부터 갤러리 류가헌에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살았던 동네 이름을 ‘시절’ 앞에 붙여 생을 분류한다. 이를테면, ‘삼청동 시절’, ‘돈암동 시절’ 식으로. 공간의 토대 위에 시간이 축조되었기에, 그 기억은 구체적인 입체다. 현실의 돈암동이, 삼청동이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했다 해도, ‘시절’ 속의 공간은 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박종진에게는 서울시 구로구 항동이 그런 곳이다. 중학생이던 1971년부터 살기 시작해, 꽃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심은 목련나무 묘목들이 수령 40년을 넘긴 ‘항동 206번지’ 집. 백목련과 자목련 두 그루 목련 꽃잎이 기와지붕을 덮는 풍경을 40여 번의 봄마다 보았고, 그 모든 꽃잎 수보다 많은 추억들이 ‘항동 시절’이라는 말 안에 담겼다.

사진가이기 이전에 역사학자로서, 그 ‘항동 시절’을 기록하고 싶어서 처음 카메라를 든 것이 2000년이었다. 206번지 집을 중심으로 코스모스 핀 철도변 풍경이며, 눈 내리는 마을 풍경까지 항동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아나갔다.

그렇게 10년 정도 기록했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달리아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꽃을 따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2010년 봄에는 항동 땅 대부분이 보금자리 주택으로 지정 고시되었고, 여름에는 큰 태풍으로 아버지가 심었던 목련나무 두 그루도 뿌리째 뽑혀나갔다. 2011년에는 집 앞을 가로지르는 사차선 도로가 개통되었고, 이제 항동의 개발로 206번지 집은 그동안 그린벨트로 보존되었던 자연과 더불어 사라질 예정이다. 항동이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사진기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사진으로라도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 더 커갔다. 그렇게 15년 여를 찍은 사진들이 바로 [항동 206번지]다.

작가는 말한다 “이번 전시가 개발된 이후에도 ‘항동’이 오래 기억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진문화공동체 [마음의 고향]을 통해 박종진의 작업을 지켜 본 사진가 최광호는 이번 전시를 또 이렇게 말한다. “하찮지만 푸근한 일상 속에 박종진이 바라본 어린 날의 시간과 부모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1956년에 태어난 우리들의 시간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 저마다의 시절이 함께 중첩되어 보여 질 ‘항동 시절’, 박종진 사진전 [항동 206번지]는 2월 10일부터 15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린다.

전시 문의 : 류가헌 02-720-2010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206번지는 1966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꽃 농사를 짓던 곳이다. 아버지가 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면서 1971년 가을부터 이곳은 우리 가족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내 학창시절 추억의 대부분은 이곳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만들어졌다. ‘항동’은 부모님의 땀과 나의 꿈이 깃든 곳이다. 이곳에는 아버지께서 팔기 위해서 심은 달리아와 꽃생강을 비롯해서 언제부터인가 항동의 상징이 된 목련 등 갖가지 꽃들이 봄부터 늦가을까지 피고 졌다. 더구나 일부러 심지 않은 들꽃까지 피어나는 봄이면 ‘항동’ 밭은 말 그대로 꽃밭이 되었다.
우리 집을 포함하여 항동이 개발되어 그 동안 그린벨트로 보존되었던 자연도 더불어 사라질 예정이다. 아름다운 ‘항동’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집을 내거나 전시를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그냥 찍었을 뿐이다. 나는 역사연구자이다. 나에게 사진은 예술이기 보다는 기록이다. 역사연구자가 기록을 정리하듯이 사라질 예정인 항동의 우리 집과 밭에 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 동안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시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은 거의 대부분 2000년 이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아주 일부는 인화된 사진을 스캔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는 누가 찍은 것인지 모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전시가 ‘항동’이 개발된 이후에도 오래 기억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억을 선물하다

그는 공기와 같은 사람이다. 늘 그대로 변함이 없기에 공기같구나 한다.

그는 빛과 같은 사람이다. 대화를 할 때 보면 순간의 재치로 상대를 제압하는 빛과 같은 총기와 위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땅과 같은 사람이다. 본인의 마음이 허락을 해야 납득을 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를 흙과 같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비 오는 날, 땅이 젖어 생긴 자신의 발자국을 확인하면 걷듯, 확실한 자신감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러함이 있기에 박종진의 사진에서는 감각적이거나 세련된 사진찍음이 아니라 소소하고 소박한 그만의 삶이 묻어난다. 어깨 너머에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그 특유의 말투가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들리는 듯하다.

구로구 항동 206번지는 박종진이 중학교 3학년 때 부터 살았던 곳이다. 사춘기 정서와 꿈이 무르익었고, 그의 젊은 부모의 삶 또한 세월과 함께 자리를 잡았던 터전이 곧 개발이 되어 없어진다 하니 자신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가는 마음일 것이다.

그 아쉬움을 담아, 어린 날부터 자신이 살면서 바라본 풍경을 조금씩 조금씩 기록해 온 부지런함에 먼저 나는 감동을 한다. 하찮지만 푸근한 일상 속에 박종진이 바라본 어린 날의 시간과 부모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1956년에 태어난 우리들의 시간일 지도 모른다. (실은 그와 나는 동갑이다.)

그의 사진들은 사진으로 보기 보다는 삶의 흔적이요, 부모님들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부모님이 살아오신 항동의 정취를 그의 등 뒤를 따라 걷듯 조용히 바라보고 나의 그 시절과 그 시절 나의 부모를 잠시라도 회상하는 정감 있는 시간이 사진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속에는 잃고 잊고 산 우리의 시절이 있으므로, 그를 찾아내면서 기억의 길을 걷는 순간을 사진으로 선물 받았으면 좋겠다. 사진가 최광호
시간을 바느질하다

나의 낡은 앨범을 펼친다. 돌 백일 입학 졸업 결혼 환갑 칠순 고희... 기억하는 순간부터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나의 세월이 사진 속에서 펼쳐진다. 지쳐 힘들거나 잠시 쉬어가는 때, 습관처럼 들추어보는 사진첩은 나에게는 에너지 충전소요 위급할 때 먹는 비상약과도 같다.

박종진이 전시를 기획하고 사진책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살던 부산을 떠올렸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에 들어오기 전 까지 살았던 부산의 초장동은 큰 길이 나서 없어졌는데, 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날 때 마다 나의 청소년기가 잘라져 버린 듯한 아픔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대신하는 유일한 것이 사진(사진첩)이다. 그러나 나의 사진 속에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때문에 속이 상하는 날도 많다.

동생을 등에 업는다고 까불다가 거꾸로 떨어뜨려 혼이 난 집 앞 계단이며, 스멀스멀 기어 나온 구더기를 만지고 놀다가 파리채로 얻어맞은 재래화장실 앞이며, 바닥에 금을 그어 놓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머리채 쥐어 잡고 쌈질했던 집앞 공터며, 한여름이면 벌러덩 누워 별보며 음악듣다가 잠이 들었던 옥상 평상이며, 늘 쓸고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던 엄마의 장롱에 학교놀이 한다고 분필로 낙서를 하다가 쫓겨나 울던 2층 계단이며, 엄마의 볼멘 잔소리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항상 쪼그리고 앉아서 구두를 닦으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며...

선하고 선해서 그립고 그리워서 눈앞에 두고 들여다보고 싶어도 찍은 사진이 없고 찍었어도 보관한 사진이 없어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하다. 때문에 박종진의 작업을 보며 나는, 나는 왜 진작 이렇게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를 했다.

박종진의 사진을 보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교복치마 펄럭이면서 나대던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소리 소리치며 프라이팬을 들고 쫓아 나오시던 성성한 기운의 엄마가, 술 드시면 골목 어귀에서 슬피 우는 으악새를 고래고래 찾으시던 아버지의 물빛 두 눈이 사진 한 장 한 장 속에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그의 사진은 동심(童心)으로 읽어야 하는 동화(童話)다. 시심(詩心)으로 그리고 보아야 하는 시(時)의 시(詩)다. 바느질하듯 시간을 한 땀 한 땀 이어 마련한 책과 전시로 앞을 내다보고 달리느라 정신없던 나에게 정화의 시간을 갖게 해준 박종진이 고맙다. 그가 나의 사우(寫友)라 더 고맙다.

사진 읽는 사람 허 윤 정
박종진 Park Jongjin

서울(구로동)에서 출생(1956년 봄)
항동으로 이사(1971년 가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1980년 문학사, 1983년 문학석사, 1993년 문학박사)
울산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관련 간단한 이력

한겨레문화센터 윤광준 작가 ‘잘 찍은 사진 한 장’ 수강. (2009년 봄)
최광호 사진문화 공동체 ‘마음의 고향’ 참여(2011년 봄부터)

단체전시
야사모 제1회 야생화사진전시회(2003년, 은평구청 구민회관)
셀프, 허물을 벗다.(2013년, 평창 다수갤러리)
셀프, 나를 말하다.(2014년, 류가헌)
셀프, 나를 실험하다.(2014년, 영월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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