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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4. 10. 21 ~ 10. 30
전시장소 월전미술문화재단 한벽원갤러리
갤러리 주소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35-1 (02-732-3777)
참여작가 류은규, 박현두, 이원철, 임수식, 임안나
  • ⓒ류은규
    1994년 김규식선생의 딸 김현태
  • ⓒ류은규
    1994년 김중건선생의딸 김정완
  • ⓒ류은규
    1995년 안무장군 동생
  • ⓒ류은규
    1995년 항일유격대 대원 리민여사
  • ⓒ박현두
    Goodbye Stranger 1 #24, digital C-print, 60x90cm, 2003
  • ⓒ박현두
    Goodbye Stranger 2 #05, digital C-print, 139x183cm, 2007
  • ⓒ박현두
    Goodbye Strangers 05, digital C-print, 120x160cm, 2011
  • ⓒ이원철
    "TIME" London, United Kingdom, Pigment Print with Wood Frame, 120x150cm,
  • ⓒ이원철
    "TIME" London, United Kingdom, Pigment Print with Wood Frame, 120x150cm,
  • ⓒ이원철
    "TIME" Praha, Czech, Pigment Print with Wood Frame, 120x154cm
  • ⓒ이원철
    "TIME" Praha, Czech, Pigment Print with Wood Frame, 120x160cm
  • ⓒ임수식
    책가도045_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_104cm×88cm_2010
  • ⓒ임수식
    책가도061_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_145cm×197cm_2010
  • ⓒ임수식
    책가도102_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_137cm×80cm_2010
  • ⓒ임수식
    책가도174_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_53cm×53cm_2012
  • ⓒ임안나
    Restructure Climax Scene#1 Digital C-Print 250X170cm 2011
  • ⓒ임안나
    Restructure Climax Scene#7 Digital C-Print 250X170cm 2011
  • ⓒ임안나
    Restructure Climax Scene#9 Digital C-Print 125X85cm 2011
한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소리 없이 노력해 온 수림문화재단(이사장 하정웅)은 침체된 문화예술의 활성화라는 재단 설립의 근본적인 취지에 맞추어 올해 새롭게 수림사진문화상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정은 일부 재단 운영위원의 개인적인 견해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오늘날 디지털 영상시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진예술의 높은 위상에서 결정된 시대의 흐름으로 보인다.

수림사진문화상을 잉태하게 한 실질적인 배경으로 우선 미술, 음악, 연극 등 문화예술의 넓은 영역에서 공적 지원 프로그램의 한계와 특정 분야에 국한된 사적 지원의 불균형을 들 수 있다. 수림문화재단이 사진예술 활성화를 위해 기꺼이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재단의 결정에는 상대적으로 지원 프로그램이 열악한 사진작가들과 그들을 키워내는 문화적 토양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디지털 사진매체의 엄청난 발전과 1980년대 포스모더니즘 이후 사실상 재현예술을 정복한 사진의 놀라운 조형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미술에 종속된다는 편협한 인식으로 아직도 사진예술이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의 주류에서 배제되어 있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작가들 특히 전문 교육을 받은 30-40대 젊은 사진작가들이 문화예술 관련 공공 기관이 지원하는 각종 프로그램의 변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수림사진문화상 제정의 또 다른 배경은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의 다양화에 있다. 작가의 창작 활동 주변에서 대중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주변 공로자들 예컨대 비평가, 화랑인, 출판인, 기획자, 매니저, 액자 전문가, 프린트 전문가 등 사진예술 발전에 공헌한 분들에 대한 격려와 지원은 사실상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은 지나친 작가 우월주의와 가시적인 성과주의 그리고 과장된 저널리즘 효과를 경계하면서 풍부한 사진문화 토양을 위한 지원 대상의 다양화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립 배경과 의도에서 올해 초 비평가, 이론가, 기획자,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수림사진문화상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구체적인 지원 방식과 수혜자 선정 원칙을 결정하였다. 추진위원회는 그간 문화예술 분야에서 실행된 타 지원 프로그램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것들과 차별화되는 두 가지 지원 유형을 만들었다. 한편으로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서 지원 규모가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수의 작가(5명의 작가)에게 고루 수혜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특정 1인을 선별 수상할 경우 자칫 작가 영웅주의와 언론 스타주의의 위험이 있다는 추진위원회의 신중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사진문화 지원 프로그램에서 그간 사진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올해는 출판 분야에서 2명 선정)를 합리적 방식으로 선정하였다. 이후 선정된 작가들에게는 올 10월 한벽원 갤러리에서 열리는 수림 사진문화상 수상 전시회 참여와 이를 위한 창작 지원금을 지원하며 사진문화 공로자들에게는 수림 문화재단 격려금을 지원할 것이다.

수림사진문화상 추진위원회에서 진행한 2014년 제1회 수림사진문화상 수상자들에 대한 심사의 원칙은 우선 심사의 공정함과 선별의 투명성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사진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의 추천을 받아 최종적으로 선별하였고 수상 선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련 인적 사항을 엄격하게 배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경우 화려한 경력보다는 지속된 창작 활동과 그 진행과정을 우선으로 하였고 기존 유명 작가들과 다수의 수상 경력자나 중복 수혜자를 배제하면서 특히 역량은 있지만 수상에 소외되었거나 발판의 디딤돌을 찾지 못한 30-40대 젊은 작가들을 배려하였다. 사진문화 공로자 역시 최종적인 선발에서 사진문화에 기여한 결과물의 지속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올해 제정된 수림사진문화상의 지원 프로그램은 이제 뱃고동을 울리며 정박된 배가 항구를 떠나듯이 미지의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화예술의 지원은 결코 일회성에 그치는 이벤트나 요란한 축제의 꽹과리가 아니라 해가 거듭할수록 성숙해지는 지원 프로그램과 합리적 선별 그리고 어떠한 정치적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진행에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수림사진문화상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수림사진문화상 제정과 선정된 수상자들을 축하를 하며 향후 발전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수림사진문화상 운영위원회
유용태, 손영자, 이경률, 김화자, 이경문

기억과 망각의 딜레마에서

인류학자 피에르 노라 Pierre Nora 는 기억과 역사는 본질적으로 서로 대립한다고 한다. 그래서 기억은 태어나자마자 역사의 길로 가고 역사는 기억을 파괴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기억을 하나의 형태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과거는 언제나 사학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어떤 기억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조작과 왜곡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 자료나 아카이브는 조작의 의혹을 피할 수 없고 그 내용 또한 원래의 기억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집단이 경험하는 집단적 기억은 결코 유일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 구전(口傳) 역시 매번 전달자에 의해 다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단적 기억의 변질은 사실상 역사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의 변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집단적 건망증 즉 망각이다. 망각은 변질된 기억으로 흔히 시각적인 재현에서 흐린 이미지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망각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일시적으로 억압되거나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망각이 왜 일어나는가? 망각은 기억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 원인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망각으로 흔히 시간의 경과로 인한 기억 틀의 붕괴이고 또 하나는 심리적 장치에서 일어나는 의도적인 망각 즉 퇴행(regression)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집단 내부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퇴행이다. 퇴행은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에서 내 외적인 압력으로부터 적응하기 곤란할 때 유치한 단계로 되돌아가 곤란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에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외부의 자극을 받을 때 그 자극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에 저장된다. 이때 자극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이동하는 순방향 진행으로 무의식에 깊이 간직될수록 그 감각적 특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꿈이나 환영과 같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진행의 역방향도 있는데 이는 어떤 이유에서 개인 혹은 집단의 정신적 조직이 붕괴될 때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검열과 억압을 동반하는 심리적 퇴행이다.

또한 퇴행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을 가지는데 하나는 무의식에 내재된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자아 퇴행이고 또 하나는 무의식에 각인된 과거 불쾌한 기억에 대한 방어 행위 즉 망각 퇴행이다. 전자는 예컨대 어린 동생이 태어났을 때 동생을 자신의 경쟁자로 인식해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손가락을 빨고 심지어 동생의 젖병을 빠는 행위가 대표적이고, 후자의 경우로 불쾌하고 창피한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유달리 빨리 잊어지는 경우나 과거에 성취하지 못한 아픈 기억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심리적 현상을 들 수 있다. 망각은 결국 무의식에 각인된 과거 불쾌한 기억을 지우면서 스스로 자아를 방어하려는 행위 즉 의도적인 심리적 퇴행인 셈이다.

그러나 의도적인 망각 퇴행이 있는 반면 의도적인 기억의 각인도 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제의 만행에 관해 장기간의 교육적 각인을 통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학습을 통한 역사의 되새김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오늘날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일본 제국주의의 기억은 언제나 모호하게 남아있다. 실제 일본인들의 근대사는 명치유신의 근대화와 전후 일본의 경제대국으로만 채워져 있고 전쟁이라는 그들의 아픈 기억들은 일부 역사 아카이브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일본인 각자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지워진 필름처럼 사실상 망각 상태로 있다. 또한 일본 우파들의 황당한 망언 역시 언제나 조작 가능한 모호한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그들의 집단적 기억에는 그들 자신도 모르는 망각 퇴행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근대사에도 의도적인 망각 퇴행이 작동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 할 뿐이다. 이때 망각은 우리 자신의 쓰라린 기억을 치유하고자 하는 집단적 퇴행으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트라우마로 나타난다. 민족의 시련을 극복한 위대한 역사들 예컨대 오랫동안 기억하는 병자호란의 치욕과 자랑스러운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제 강점기 기억과는 반대로 역사 속에 모호한 형태로 남아 우리가 기억할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사건들 예를 들어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 식민주의의 잔재, 제주 4.3 사건과 여수 양민 학살, 편향된 우익 이데올로기와 연좌제의 폭력, 건전 좌파의 실종과 종북 색깔 논쟁 등이 있다. 거기서 우리는 역사적 결과만 언급할 뿐 그 누구도 사건의 책임과 진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더 이상 기억할 수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암묵적인 금기의 역사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오랫동안 흑백 이데올로기와 싸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기억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해방 이후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기억이다.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좌익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으로 방치된 중국 연변 자치구의 독립 유공자들과 사할린 동포들의 애환 그리고 일본 조총련과 민단과의 갈등 역시 망각 퇴행의 지속적인 침식으로 스스로 망각의 역사를 만드는 대표적인 기억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억들은 예컨대 중국과의 현실 정치로 인해 고구려 유적 발굴이나 북간도 항일운동 조사와 같이 중국과 마찰이 예상되는 불필요한 기억은 뒤로하고 반대로 하얼빈 안중근 의사 역사박물관과 같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기억만 선택하는 소위 역사의 조형성(plasticity)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것들은 모호한 형태에서 피상적인 앎의 흔적만 있을 뿐 더 이상 구체적인 경험을 알지 못하고 또한 하나의 역사로 남을 수 없는 구전의 역사일 뿐이다.

작가 류은규의 중국 조선족 기록은 단순한 동족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망각 퇴행에 대한 사진 아카이브 작업이다. 작가는 “1945년 이전 중국 동북 3성(만주)의 조선인 역사는 우리가 보듬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이주해 200만 명 이상 살았던 터전이니까요.” 또한 그는 “현지 조선족들은 사진 챙길 여유가 없고 고국에서는 관심도 없어요. 누군가 챙겨야 할 몫이 저한테 돌아온 셈이죠.”라고 언급하면서 누군가 해야 할 진정한 역사의 재구성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는 한반도 10배나 되는 동북 3성을 발품으로 돌아다니면서 사진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갔고 그들을 끝까지 설득하여 5년 동안 무려 사진 5만여 점을 수집했다. 그들의 기억들은 대부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다행히도 일부 기억들은 반박할 수 없는 사진과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남아 있었다. 지난 2000년 작가는 그 동안 수집한 사진들 중 300장을 선별하여 조선족 100년의 역사로서 『잊혀진 흔적』을 출간하여 초기 연변 조선족의 정착에서부터 그들의 항일투쟁,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개혁 개방 후 오늘날의 모습까지 격동의 중국 조선족 이민사를 생생히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의 사진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그 구성에서 전통 다큐멘터리 구조와는 다른 몇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작가가 보여주는 장면들은 물론 정확한 연대 없이 무작위로 모아온 것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응시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역사의 재구성보다 학습된 역사를 통해 추상적인 상황만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환기는 특히 인물과 연관된 과거 모호한 역사의 환기로 이해된다. 예컨대 사진에 나타난 생존하는 만주 항일운동가의 후손들, 조선 의용군, 한국전에 중공군으로 참전 조선족 군인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희생된 연변 조선족들은 역사적 사건에 직접 연관된 구체적인 기억이 아니라 그 익명의 인물과 장소와는 관계없이 오로지 모호한 교과서 역사만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늘날 흑백의 이데올로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가 아닌 추상적인 형태로 알고 있는 금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작가 사진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응시자에게 역사의 직조를 짜게 하는 기억 틀의 부재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장면들은 구체적인 장소와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일반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오로지 어떤 있음직한 사건의 흔적으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장면의 해석학적인 구조는 오로지 중국이라는 지리학적인 사실 이상 그 어떤 역사적인 문맥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화면 중앙에 정면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은 그들의 어색한 포즈로 인해 언제나 배경과 이질적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들은 거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면서 오히려 응시자를 관찰하듯이 예컨대 우리가 아는 독립유공자의 당당하고 근엄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와 같은 역사적 시련을 겪어온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국가유공자의 틀에서 소외된 변방의 이방인으로 출현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늘날 영토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국가유공자들로서 중국 조선족과 그 후손들의 과거 행적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소외된 조선족에 대한 물질적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길들여진 편향된 이데올로기에서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진행되고 있는 망각 퇴행에 대한 준엄한 경고일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작가의 아카이브 사진은 기억과 망각의 딜레마에서 암묵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이해된다. 바로 여기에 예술로서 다큐멘터리 아카이브가 존재할 것이다.

사진비평가 이경률

박현두의 굿바이 스트레인저 1, 2, 3...

이 수 균 (미술비평)

올해 제1회 수림사진문화상을 수상하는 박현두 작가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며 박현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류하는 "Goodbye Stranger 1, 2, 3"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약 10여년의 기간 동안 작가가 모색하고 고뇌하였던 바를 시간적 순서로 구분해 놓은 작품들로서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작가가 미국 유학 중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소외의 감정을 자화상Self-potrait의 형식으로 연출한 작품 "Stranger 1"은 향후 작가가 나아갈 큰 길을 결정해 준 방향타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 박현두는 작가 자신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느끼고 있는 소외와 고독, 외로움, 자아 상실과도 같은 현대적 고질병에 대해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과장되게,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울하게 표출하고 있다. 사실 현대인은 아무리 이웃과 담장 하나, 또는 좁은 아파트 속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군집해 살고 있더라도 서로 이름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같은 직장에 다닌다 하더라도 각자의 업무 시간이 끝나면 대화 한 번 없이 혼자의 집이나 취미를 찾아 부리나케 도피한다. 현대인이 느끼는 이러한 고립감을 사회학자들은 일찌감치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이나 소설가들의 단골 주제가 되어 왔기에 주제 자체로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적 우울증의 원인의 근저에는 우리 사회가 현대 사회로 이동하며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공동 사회의 해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을 보더라도 20세기 중 후반까지는 산업화가 미약했기 때문에 최소한 지역 공동체가 존재했었고, 각각의 공동체는 공통의 가치와 규범, 유사한 인생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종의 유대감과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소박한 인생관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에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의 물질적 생활은 풍요해졌으나 대신 수 천 년 지속되어 왔던 정신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작가가 유학 생활 중에 느끼는 고립감은 낯선 생활 풍습과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과 다른 생김새, 언어적 차이로 인해 훨씬 더 커지게 된다. 이것은 유학이나 직장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 정도는 뼈저리게 느끼는 심정이다. 박현두 작가 역시 자신의 이러한 고독감과 외로움의 일차적 책임을 산업 사회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산업사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거대한 굴뚝이나 보일러, 대형 건축물, 대도시 공장지대나 산업화 도로 등 인간이 소외되고 살기 어려운 지역들을 찾아다니며 연출의 장소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절 박현두 작가가 내보이는 자연도 이미 인간과 공존하던 옛 시절의 자연은 더 이상 아니다. 자연은 이미 이익 창출을 위해 거대 자본이 투여된 인위적 자연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도 인간은 자연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자연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 환경 속에서 살도록 강요받는다. 그리고 도시의 노동자는 더는 스스로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삶을 강요받는다. 그러면서 삶은 지금까지의 상징적 가치나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미한 삶으로 변질되며, 인간은 항구적인 어떤 가치나 의미를 좇아 살아가지 못한다.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순간순간 바뀌는 신호에 종속되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파란 불이 켜졌기 때문에 길을 건너고, 달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취침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잠을 잔다. 신호에 따른 삶 속에서 항구적인 상징적 의미나 종교적 의미를 구한다는 것은 하얀 손수건을 초록 손수건이라고 우기는 것만큼 억지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서 현대인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박현두 작가는 이에 대한 답을 "Goodbye Stranger" 시리즈를 통해 나름대로 모색하려고 한다. 그래서 시리즈 1과 2는 모색의 방향이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시리즈 1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나 스스로를 이방인이라는 감정을 지우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모든 것에 대한 문을 닫고 밖의 세계를 둘러보게 만드는 과정 그 자체이다. (...) 이 이질적인 환경과 '나'와의 관계를 한편으로는 부합, 동화시키고 또한 이를 통해 이방인으로서의 탈피를 꾀하여 절대적인 나의 존재를 찾아 인식하려는 시도도 들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질적인 환경과 부합, 동화되고 싶다고 했으나 그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희망처럼 보인다. 나아가서 절대적인 나의 존재, 절대적인 자아를 찾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복수적이고 항시 변하는 이질적인 환경으로 이뤄진 현대 사회에서는 변함없고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란 신이 아닌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러한 가상의 신조차도 이미 현대 사회에서는 니체의 진단과 함께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리즈 1이 고통스러운 타자 앞에서 고발과 도피 쪽으로 향했다면, 시리즈 2는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도전의 형식을 띤다. 그것은 바로 박현두 작가가 현대 사회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일찌감치 지적한 '공연spectacle의 사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박현두 작가에게서 드러나는 '공연의 사회'적인 모습은 시리즈 2를 분석한 손영실 박사가 잘 지적하였다. 기 드보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관객의 소외의 또 다른 방식으로 스펙터클을 정의하지만, 그러한 복잡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시스템인 매스컴과 멀리 떨어진 단말기 앞에서 새로운 지배 권력인 매스컴이 제공하는 가상의 현실만을 현실로 인식하는 관객 사이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족해야 하는, 이미지와 현실의 수동적인 소비자인 현대 관객의 상황을 잘 대변한다. 그리고 현대 대중 사회의 구성과 유지는 매스컴에 의한 관객의 조작과 선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연의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현대적 기술이 뒤따른다. 따라서 공연의 사회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카메라와 TV의 발달과 같은 기술 사회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술 사회는 다시 한 번 인간을 소외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기술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인간 사이의 종합적 협력 대신에 노동 분화를 야기함으로써 인간을 소외 시켰다. 특히 기술은 모든 상징적 의미 시스템을 일소한 주역이기도 하다. 기술에게는 효용성이 중요하지 절차상의 도덕이나 생의 의미, 인도주의와 같은 추상적 의미란 오히려 불편한 장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현두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것들을 ‘기술 시스템’과 ‘공연의 사회’ 한 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그러한 소외된 인간들에게도 사회의 주역이 차지하는 위치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세트와는 상관이 없는 개개인을 그 장소에 데려가 촬영함으로 대중 속에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일종의 동반자를 만들어 주면서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한다."

시리즈 3에서는 시리즈 1과 2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시리즈 1에서 보이는 음울한 분위기보다는, 시리즈 2에서 보이는 도전적인 이미지가 훨씬 강하게 풍긴다. 그렇기에 강한 역동성과 과장된 연출로부터 나오는 도발적 성격, 해학이 묻어 나온다. 작가는 그것을 현대인들이 소외된 환경 속에서 느끼는 "소통과 단절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라고 분석한다. 그것을 더욱 실감나게 하기 위해 시리즈 3에서는 거대한 마천루나 웅장한 대자연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외줄타기 놀이가 자행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박현두 작가에게서 현대 사회의 기술적 이미지와 공연적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예술의 탐미적이고 유희적인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의 화면은 더욱 더 강한 색채와 과장, 그리고 상징보다는 풍자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며 삶의 항구적인 상징성이나 인생의 깊이를 추구하던 과거의 예술과는 달리, 순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다시 말해 사회의 어떤 공통된 의식과 사고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 미술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박현두 작가는 타인과의 소통을 꾀하며 자신을 비롯한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치유하고자 한다. ‘공연의 사회’에 대한 현실을 인식한 작가의 앞으로의 결실들을 기대해 본다.

응축된 빛이 제공하는 비가시적인 것의 통찰

장민한(조선대학교 교수, 미학)

이원철 작가는 빛을 기록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의 장점을 누구보다도 잘 이용한다. 피사체에 투사되는 빛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삶과 죽음, 시간, 역사 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새롭거나 진기한 소재를 발굴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긴 시간의 노출과 색채 보정을 통해 세상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소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체를 다루는 섬세한 솜씨를 통해서 주제를 새롭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이 지니고 있어야 할 덕목을 잘 갖추고 있다.
그는 장노출을 통해 공기 중의 먼지를 포함하여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화면에 희미한 흔적으로 나타남으로써 화면 전체가 낯설면서도 신비스럽게 보인다. 이와 동시에 현상 과정의 색조 보정을 통해 심미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화면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화면이 신비하고 낯선 매력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매력이 감상자로 하여금 그 제작 과정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제작과정에 대한 이해가 피사체를 새롭게 보도록 촉발한다. 화면이 긴 시간의 빛의 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서 고분이나 공장, 대형 시계탑이 있는 도시를 순간과 영원, 삶과 죽음, 문명과 자연의 대비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사진의 피사체가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빛과 피사체의 관계가 주제가 된다.
"Starlight-경주"(2007), "Circle of Being"(2008) 시리즈에서는 장노출 기법을 사용하여 경주 고분에 투사되는 미묘한 색채의 빛을 잡아내고 있다. 작가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섞여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는 경주 고분에서 실제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드럽고 신비한 색채를 찾아낸다. 이것이 경주 고분이라는 피사체에 투사되면서 일상에서는 의식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를 제시한다. 이 색채는 고분과 대비되면서 축적된 시간을 상징하게 되고 이를 통해 현재와 과거, 삶과 죽음, 그리고 순간과 영원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즉각적인 아름다움을 주면서도 인간의 피해갈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과 통찰을 제시한다.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 받아 그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에 제작된 "Industrial Starlight"(2009) 시리즈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결합된 빛들을 중첩시켜서 한국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었던 공장들의 모습을 낯설게 만든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장노출과 색채 보정 기법이 피사체를 어느 정도까지 색다르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기계적이고 즉물적인 느낌의 공장은 사라지고 자의식을 가진 듯 생기 있는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통해 공장이 지닌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보다는 빛의 축적이 마술처럼 모든 대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전시"Time"(2014) 시리즈에서는 직접적으로 빛에서 시간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이전 시리즈까지는 빛을 통해 시간을 은유적으로 의식하게 만들었다면 이번 시리즈에서는 시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다. 작가는 영국, 헝가리, 체코, 중국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각 도시의 시계탑을 그 주변 배경과 함께 장노출 기법으로 화면에 담고 있다. 장노출 기법과 화면 보정을 통해 피사체를 색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가 꾸준히 진행해 온 "Starlight"작업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이전의 작업들과 달리 작가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전 작업들은 고분이나 공장 등 해당 피사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으나 이번 "Time"시리즈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즉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작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계탑에서 그 해석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작가는 바늘이 사라진 시계와 육중한 건물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빛의 잔상, 즉 먼지처럼 뿌옇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취를 통해 시간의 흐름, 인간의 욕망과 그 무상함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 시리즈의 작품들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는 빛의 축적과 해당 피사체의 대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현재와 과거, 더 나아가 역사 속에서 지금의 의미를 반추했다면, 이번 시리즈의 작품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 속에서 시간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작가는 시계탑으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유한자의 욕망을 시계바늘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세월의 덧없음과 대비시키고 있다.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은 유한성과 덧없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 욕망의 분출의 하나가 각 도시에 건설된 커다란 시계탑이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이번 작품을 시계 속에서 시간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이 시리즈의 작품은 유한성과 덧없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의 상징으로서 시계탑과 잔상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무상함을 대비시킨다. 이를 통해서 순간과 영원, 존재와 비존재, 인간과 문명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이원철 작가는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비가시적인 것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진기의 기본인 빛을 세심하게 이용함으로써 해당 피사체에 관한 비가시적인 통찰을 보여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오늘날은 무엇보다도 매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시대이다. 양식이 주제가 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진 매체의 잠재력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림사진문화상 수상자로서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성실한 발굴자, 임수식

올 봄에 [간(間)텍스트]전시를 기획하면서 나는 “사진가 임수식은 성실한 발굴자다”라는 말로 그를 소개 한 적이 있었다. 대체로 한 개의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진가이자 교육자, 행정가, 기획자로서 그의 다양한 면면은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자기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아는 사람이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아마도 임수식의 한 개의 표정 속 다양한 얼굴일 것이다. 지난겨울에는 ‘협동조합 사진공방’인 [공간291]을 만들며 새로운 사진 문화의 실천의 장을 열었다. 사진작가이자 교육자로서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고급예술로서의 사진과 전방위적인 영역에 편재한 사진 문화의 가교의 필요성을 절감한 듯하다. 그 와중에 한 땀 한 땀 작품을 일궈내는 부지런한 노동의 집적은 지난 칠년 사이 열 번이 넘는 개인전에서 보여준다. 임수식의 성실한 행보는 세계를 ‘관계맺음’의 총체로 생각하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유와 함께 한다. 조각보처럼 꿰맨 그의 [책가도]시리즈처럼, 개별 세계를 이어 주는 것은 박음질 ‘사이’가 있기에 가능함을 터득한 것이리라. 그에게 사진작업은 세계의 확인이나 인식의 행위가 아니라 공감과 연동이 생생하게 일어난 창조의 행위이다.

임수식은 [수필](2007)을 시작으로 [Room.K.](2009), [바벨의 도서관](2010), [책가도](2008~현재)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한다. 서른 살을 넘겨 첫 개인전을 열었으니 다소 늦은 편이지만, 그동안 사진의 깊이를 파고 들어가는 무거운 노동의 축적으로 ‘늦됨’의 성숙한 세계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첫 작품에서부터 현재까지 임수식은 언어와 이미지와의 관계맺음을 탐색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로는 공통적으로 ‘책’이 등장한다. 인식의 세계가 책-문자를 통해 열리고 그 세계는 해석과 분석으로 이뤄진다면, 임수식에게 책은 귀한 의미존재이자 희미한 이미지존재로 양립한다. 그것은 로고스의 절대 보고이면서, 의미의 감옥이자, 의미의 결핍으로 이뤄진 존재의 집이다. [수필], [Room.K.], [바벨의 도서관]에서 책에 대한 정보와 텍스트의 의미 등 확연한 서사와 내용은 사라진다. 책의 공간, 문자의 테두리를 해체하고 책의 바깥과 물성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읽어낼 수 없는 글자들의 집합이 [수필]이라면, [Room.K.]에서는 무슨 책인지 도무지 확인할 수 없는 책등만 드러난다. 책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책의 저자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드넓은 풍경 속에서 [바벨의 도서관]은 곳곳에 하얀 여백으로 서 있다. 관객은 그저 모호한 맹목의 사진보기를 시도하며 의미로부터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임수식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없는 시니피앙의 변주로서만 유효하다.

그 모든 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책가도]에 이르러 원근이 해체되며 다시점으로 형상화된다. 이 시리즈는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최소 사흘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사진을 찍는 눈 대신, 사진을 쥐고 바느질을 하는 손의 시간이 8할을 차지한다. 작가의 지문이 지나가는 자리가 화석처럼 남아서 탄생한 작업이 [책가도]인 것이다. 가끔 농조로 ‘수식’어구 없는 간결한 텍스트, 직관과 노동으로만 이뤄진 텍스트가 바로 임수식의 ‘수식 없는 책가도’라고 말하기도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적합한 표현이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한 점의 사진인 [책가도]는 책장을 소유한 이의 사유의 아우라가 임수식의 바느질을 통해 현현(顯現)되는데, 재현할 수 없는 것의 직조로 이뤄진 이 작업으로 세간의 주의력을 이끌어낸다.

임수식에게 사진 찍기란 언제나 이전의 텍스트에 대한 새로 찍기(쓰기)에 다름 아니다. 총체적이고 단일한 의미의 세계가 아니라, 글쓴이와 제목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번역의 과정이 곧 그의 작업과정이다. 이미 그는 대학원 졸업 작품이자 초기 작품인 [Picturenary]에서 이미지와 언어와의 관계를 모색한 바 있다. 사진 이미지를 해석하는데 단일한 정의는 없고, 사진에 찍힌 사물들도 찍히기 이전부터 각각 개별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이 작업은, 일견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화들을 사전적 정의와 함께 병치시켜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상징적이고 암시적으로 보여준 참신한 작품이었다. 단순히 사진을 찍고 보여주는 방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관객의 해석을 이끌어내는 생성의 공간이 초기 작품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카메라라는 어두운 미궁을 오래 여기 저기 헤매다보면 아주 옅은 빛에도 금세 노출되는 필연에 이른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 나가는 일이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수만의 거울환상들에 부딪히고 오인으로 막혀있던 스크린을 거두어내기를 반복해야 밖으로의 걸음이 비로소 가능하듯이. 사진 찍는 일은 어쩌면 맹목의 지점을 끝없이 확인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임수식이 지난 10여 년간 어둠과 더불어 극진하게 발굴해낸 에스페란토어가 앞으로도 오독과 해독사이에서 즐겁고 다정하게 읽히기를 기대한다.

최연하(전시기획자, 사진비평)

죽음과 미혹의 공모

우리의 시선은 온갖 매체를 통해 지구촌에서 전송되는 전쟁과 폭력 장면들에 중독 된지 오래다. 디지털과 정보통신 기술의 혁명은 ‘이미지’를 보는 행위의 기준으로 만들고,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발발하는 ‘전쟁의 광기’조차 스펙터클로 향유하게 만들었다. 작가 임안나는 평화수호와 침략이란 전쟁의 양면성과 참혹한 폭력이 대중매체와 게임으로 조작, 희화된 양상을 영화장면처럼 살상무기들에 과도한 조명을 비추거나 치밀한 미장센(Mise-en-Scène), 초현실적인 색 대비에 의한 역설적인 재구성 방식으로 폭로해 왔다. 임안나는 자신의 주제의식을 사진의 전통적인 기록방식과 연출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 연결해서 문제화하는 한국 여성사진계의 중심적인 작가다. 살상무기는 없지만 작업 스타일의 전환기이자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던 [White Veil](2008) 연작에서 사물들을 낯설게 병치하거나 탈색된 흰색과 파란색을 충돌시키는 ‘상상적 유희’가 앞으로 작가의 문제의식을 가시화 할 전략임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 발표된 [Restructure of Climax(클라이막스의 재구성)](2011), [Irony-addicted(중독된 아이러니)](2012)와 최근 작업 중인 미발표 신작 [Warship:Worship], [Props for glory]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전쟁의 역설적인 광기와 미디어의 공모에 의해 정치, 경제, 성(性), 문화 전반에 확산, 은폐된 폭력의 질서를 상반된 것들을 충돌시키면서 누설한다.

임안나는 파괴와 평화, 죽음과 삶처럼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의 순환성’을 내포한 전쟁의 이중적 특징을 현실과 가상, 폭력과 놀이, 광기와 환상적인 색채를 대비시켜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아이러니(irony)’ 전략을 사용해 폭로해 왔다. 독일의 낭만주의 이론가 슐레겔(F. Schlegel)은 그리스의 에이로네이아(eironeia, 위장)가 기원인 아이러니의 "자기창조와 자기파괴의 변화"라는 모순적 상황의 추동성에서 예술적인 ‘우상의 가면 벗기기’ 특징을 발견했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연속이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아이러니 수사법은 현대사회의 해결할 수 없는 현실과 이상 간의 부조화에서 발생하는 보이는 것과 내포된 의미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작가는 역사를 통해 무한히 반복되는 전쟁에서 평화와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순환되는 이중적 몸짓과 현실이 미디어로 왜곡되며 실재와 가상이 애매하게 모의하는 경계를 실제 군대무기를 엄밀하게 기록하거나 프라모델 무기와 병정, 소품들을 활용한 역할놀이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시각화해 놓는다.

[Restructure of Climax]는 살상무기들이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거대한 기념물처럼 촬영된 [[The Other Side of Arms]]과 장난감 병정들이 경제적 침략을 상징하는 수입 농산물들을 표적삼아 전쟁하는 극처럼 연출된 [[Romantic Soldiers]]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The Other Side of Arms]] 연작을 민간인에게 절대적으로 폐쇄적인 군대를 직접 방문해 기록한 것이지만, 영화촬영장 같은 강렬한 조명을 화면에 노출시켜 실제 전쟁보다는 매체와 게임의 이미지로 체험, 소비되는 현대사회의 모순을 꼬집었다. 영상매체와 무기 발달의 상관성을 연구한 매체이론가 비릴리오(P. Virilio)가 전쟁터와 영화세트장의 역설적인 관계에 주목했듯, [Irony-addicted]에서 작가는 거울, 꽃, 가면처럼 그 자체로 양면적인 요소를 지닌 소재들을 사용해 전쟁과 환상에 대한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백색 배경에 장난감 무기와 거울에 투사된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는 미장센은 실재와 환상이 창조와 파괴를 끊임없이 오가며 미끄러지는 이중 유희로 허상에 중독된 부조리한 현상을 고발한다.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한 프라모델 무기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반영인 ‘미장아빔(mise en abym)’을 연상시키며 보이는 것과 함축된 의미 사이의 모순적인 충돌이 되풀이해서 복제되는 ‘해결 불가능한 무(無)의 지점’과 마주하게 한다. 여성의 몸에 중첩시킨 전쟁병기는 물리적인 영토 넘어 여성을 식민지화해서 수탈하는 남근의 상징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표출된 것이다.

미발표 신작 [Warship:Worship], [Props for Glory]에서도 임안나는 같은 주제의식을 통시적 관점, 즉 침략과 파괴의 역사로 확장시켜 탐색하고 있다. [Warship:Worship]는 6·25 전쟁에 사용되었던 무기들, 사용기한이 끝난 폐무기들에서 ‘파괴의 공포’는 탈루되고 우상처럼 숭배되는 부조리한 현상을 기록한 것이다. 전쟁의 승리와 패권을 기념하는 건축물과 영토를 배경으로 소품 병기들을 촬영한 [Props for Glory]는 열강의 번영이 식민지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수탈한 제국주의의 허구적인 영광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해준다. 숭배된 무기와 허구적 영광은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한 폭력의 반복되는 순환일 뿐 더 이상 미래로 향한 창이 될 수 없다. 아울러 폭력적인 힘과 영광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위장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 전쟁 기념물들은 과거 기억의 환기 너머 미래로 향한 거울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임안나는 전쟁무기와 역사적인 장소에 함축된 이중적인 모순, 미디어에 내재적으로 구조화된 폭력을 위반과 일탈을 꿈꾸는 인간의 본질이자 현대성의 특징이기도 한 아이러니 전략으로 시각해 놓았다. 낭만적인 상상력과 유희 감각으로 작가는 폭력의 광기를 초현실적인 미장센과 탐미적인 색채로 표현해 왔다. 작가 특유의 유희 감각은 국가와 미디어의 지배질서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정치성을 정지시키는 장치다. 즉 임안나는 실제 살인병기를 엄정하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방식과 가상의 극화를 충돌시켜 헤게모니의 생성과 파괴가 반복해 변화하는 지점을 들춰내었다. 더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도되는 아이러니와 실재와 미디어의 정보가 전도되는 아이러니를 교차시키며 국가, 자본, 미디어의 권력이 모의한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벗겨낸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음은 어디로 향할지 기대하게 해준다. 임안나가 주도면밀하게 문제 삼는 폭력의 광기는 성차(性差)는 물론 기술문화의 폭력이 점점 교활해지는 현대사회의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현실세계의 아이러니를 작가는 창조와 파괴라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인간욕망의 한계인지, 신자유주의 경제자본과 미디어 권력, ‘구경꾼’의 공모인지 질문한다.

김화자(미학, 사진비평, 성균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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