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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017.09.30 00:06

김도주 사진전

조회 수 179 추천 수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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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마애불
전시기간 2017. 9. 29 ~ 10. 29
전시장소 진주문화공간 루시다 Lucida, Jinju
갤러리 주소 경남 진주시 망경북길 38 (진주시 망경동 96-9번지) (055.759.7165)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lucida.kr
관람시간 11:00 ~ 21:00
마애불,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조성되기 시작한 마애불은 불교미술사에서 한국문화의 특성이 가장 잘 반영된 문화유산으로 꼽는다. ‘바위에 새긴 불상’을 의미하는 마애불, 어떤 이유가 있어 마애불을 찍기 시작했는지 김도주 작가는 마애불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이렇게 거의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된 마애불의 얼굴은 200여점이 넘었다. 전국에 분포된 마애불의 수가 그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마애불들이 김도주 작가의 앵글에 담긴 셈이다. 바위에 새긴 불상, 뜯어보니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여러 문헌 자료들을 근거로 볼 때 서산마애삼존불과 태안마애삼존불과 같은 삼국시대 최초로 발견된 마애불과 불교문화가 꽃피운 통일신라시대 마애불들은 부드러운 얼굴생김새와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현대의 미학적 기준에 갖다 대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반면 정치권과 권력층의 영향을 받은 고려 시대 마애불은 규모가 커진 반면 정교함은 사라졌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조선조에는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료들을 조목조목 따져보자는 의도일까. 김도주 작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정교한 촬영을 시도했다. 마치 눈코입 손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정으로 돌을 쪼아 마애불을 만든 당시 석공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그의 촬영메모에는 마애불의 얼굴표정과 인상, 입가의 미소, 주름, 앉은 모습, 양손의 위치 등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마애불은 주변 환경조건과 위치, 그리고 그 마애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여러해 마애불을 찍어 온 작가가 이정도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의 앵글이 향한 곳은 마애불의 마음 속 깊은 곳이다. 시대에 따라, 때로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이념에 따라 그 모습들이 변모했다고는 하나 마애불에는 기본적으로 기복신앙이 바탕에 흐르고 있다. 마애불 조성당시 석공이 전문가였든 일반 백성이었든 그의 마음이 바위에 투사되었음에 분명하다. 화강암 단단한 바위를 쪼아내어 정성을 다해 부처님을 밖으로 보이고자 한 석공의 마음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부처님께 의탁하고자 한 간절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래서 지금도 그 모습을 바라보면 친근한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 것일까? 세월에 깎여나간 팔 다리며 의복에서도 실눈을 뜨고 세상을 관조하듯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에서도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 엄격한 선생님의 모습,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동네 아저씨 ...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상상할 수 있는 인상을 발견한다. 작가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찾고 경험했던 안식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자 오랫동안 마애불을 찍어 온 것이다. 김도주의 마애불, 보고 있자니 웃음이 번진다.
  • ⓒ김도주
  • ⓒ김도주
    20x30inch 9253s-경주남산,신선암,통일신라
  • ⓒ김도주
    20x31inch 8002s-강원영월무릉리,고려
  • ⓒ김도주
    20x24inch 8944s-이천소고리마애불좌상과삼존불,고려13-14세기(포스터)
  • ⓒ김도주
    동화사3 72351(통일신라9세기)
마애불,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조성되기 시작한 마애불은 불교미술사에서 한국문화의 특성이 가장 잘 반영된 문화유산으로 꼽는다.

‘바위에 새긴 불상’을 의미하는 마애불, 어떤 이유가 있어 마애불을 찍기 시작했는지 김도주 작가는 마애불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이렇게 거의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된 마애불의 얼굴은 200여점이 넘었다. 전국에 분포된 마애불의 수가 그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마애불들이 김도주 작가의 앵글에 담긴 셈이다.

바위에 새긴 불상, 뜯어보니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여러 문헌 자료들을 근거로 볼 때 서산마애삼존불과 태안마애삼존불과 같은 삼국시대 최초로 발견된 마애불과 불교문화가 꽃피운 통일신라시대 마애불들은 부드러운 얼굴생김새와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현대의 미학적 기준에 갖다 대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반면 정치권과 권력층의 영향을 받은 고려 시대 마애불은 규모가 커진 반면 정교함은 사라졌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받아들인 조선조에는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사료들을 조목조목 따져보자는 의도일까. 김도주 작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정교한 촬영을 시도했다. 마치 눈코입 손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정으로 돌을 쪼아 마애불을 만든 당시 석공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그의 촬영메모에는 마애불의 얼굴표정과 인상, 입가의 미소, 주름, 앉은 모습, 양손의 위치 등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마애불은 주변 환경조건과 위치, 그리고 그 마애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여러해 마애불을 찍어 온 작가가 이정도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의 앵글이 향한 곳은 마애불의 마음 속 깊은 곳이다.

시대에 따라, 때로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이념에 따라 그 모습들이 변모했다고는 하나 마애불에는 기본적으로 기복신앙이 바탕에 흐르고 있다. 마애불 조성당시 석공이 전문가였든 일반 백성이었든 그의 마음이 바위에 투사되었음에 분명하다. 화강암 단단한 바위를 쪼아내어 정성을 다해 부처님을 밖으로 보이고자 한 석공의 마음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부처님께 의탁하고자 한 간절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그래서 지금도 그 모습을 바라보면 친근한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 것일까? 세월에 깎여나간 팔 다리며 의복에서도 실눈을 뜨고 세상을 관조하듯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에서도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 엄격한 선생님의 모습,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동네 아저씨 ...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상상할 수 있는 인상을 발견한다.
작가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찾고 경험했던 안식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자 오랫동안 마애불을 찍어 온 것이다.

김도주의 마애불, 보고 있자니 웃음이 번진다.
마애불을 닮은 사진작가 김도주

마애불 작업을 어떻게 시작했냐는 질문에 김도주 작가는 소박하게 답했다. 사진을 찍다보니 마애불이 눈에 들어왔고 오래 찍다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마애불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7년 전이라 말했지만 여러 파일 자료들은 거의 10년이 넘은 것들도 있었다.
그를 이토록 오랫동안 마애불에 매달리게 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가의 얼굴을 뜯어보니 마애불의 그 표정을 많이 닮아 있다. 표정은 그의 심성을 대변하는 것일까? 작가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 당시 ‘장수 사진 찍어 주는 경찰관' 으로 유명했다. 수사과 감식계에서 시체를 담당하면서 장수 사진도 없이 돌아가신 분들이 안타까워 한 장, 두 장 찍어준 사진이 1500장이 넘었다고 한다.

1956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작가는 올해 1월과 4월에 <절벽에 꽃 피운 천년의 미소>로 의병박물관과 양산 통도사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사진 찍는 일을 수행삼아 활동해온 그의 사진인생은 얼추 30년을 훌쩍 뛰어 넘는다. 경찰공무원으로 한평생 몸담으면서 틈틈이 독학으로 사진공부를 하며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경찰공무원 최초로 공무원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어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사진가협회 창원지부 회원과 의령사진동우회 회장을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번 사진전은 나의 작품 중 마애불 관련 사진만 추려서 갖는 전시회다.
바위에 새긴 불상인 마애불은 어느 하나같은 것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 얼굴표정과 생김새, 자세 그리고 바위에 마애불을 새긴 조각방법 등 답사가 거듭될수록 다채로운 불상들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전국을 돌며 거의 200여 곳의 불상을 촬영했다. 그리고 어렵게 찾은 곳이 조건이 좋지 않아 여러 번 발걸음 한 곳도 많다. 단단한 화강암에 자신의 불심을 실어 하나하나 조각한 전문석공들 그리고 이름 모를 백성들의 정성이 천년을 뛰어넘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불가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어느 곳이든 계신다고 한다. 마애불은 만든 이들도 단순히 정과 망치로 바윗돌을 쪼아 만든 게 아니다. 바위 속에 깃든 부처님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게 만든 것이다.
그동안 답사에 친구처럼 동행해 준 아내, 태민 엄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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