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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7 17:37

차경희 Kyounghee 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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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터, 지속된 시간 The Ground
전시기간 2015. 11. 6 ~ 11. 30
전시장소 진주 미르아트홀
오프닝 2015. 11. 7(토) 오후 2시
갤러리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22 진주미르치과병원 8층
작가 홈페이지 http://ww.cha-kh.com
“It might be that if we love someone beyond measure, then even death falls in that love and forgets his own duty, leaving the person whom he ought to perish alive, as vividly as the person was in his lifetime. And this might be what you call the photographic image.”[Excerpt from Kim, Jinyoung’s “Silent Days.”] The series named “The Ground” began with my effort to comfort myself after losing my sister. His death was an accident that taught me that how to take a step forward in everyday life could determine life and death. I have no choice but to miss the time that we shared together, but on the other hand, it remains in my memory as a different being, telling me that death is not disappearance but another form of ‘being alive.’ What was it that was shown to her lying in her last bed? Was our house seen by her eyes? When man dies, he returns to the dust. I left for the natural landscape that includes the dust in which ‘the deceased is living.’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충북 충주, Pigment Print_130x150cm_2006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제주 우도, Pigment Print_130x150cm_2007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경북 예천, Pigment Print_130x150cm_2011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충북 괴산, Pigment Print_130x150cm_2007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경남 하동, Pigment Print_130x150cm_2011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경남 하동, Pigment Print_130x150cm_2011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강원 영월, Pigment Print_130x150cm_2011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강원 평창, Pigment Print_130x150cm_2012
  • ⓒ차경희 Kyounghee Cha
    터, 지속된 시간, 전남 구례, Pigment Print_130x150cm_2011
2015년 11월 6일(금)부터 11월 30(월)일 까지 진주지역 사진예술 공간들과의 협업으로 운영되는 ‘미르아트홀’에서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전이 열린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곳곳을 다니며 한국의 자연을 프레임 안에 담은 차경희의 풍경사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공존하는 자연적 생의 공간, 즉 지속된 시간이 흐르는 ‘터’로 표현된다. 더불어 이 ‘터’는 누구나 살고 있는 존재의 공간, 시간의 운명을 따라서 먼저 떠나고 뒤에 남은 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깊은 마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펼쳐진 대지, 흐르는 산맥, 그 위에 풍성한 나무들,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길들과 보일 듯 안 보일 듯 풍경 안에 자리 잡은 봉분들. 이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대기와 그 안에 충만한 빛들은 차경희의 풍경이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자연의 얼굴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너머서 이어지는 사랑과 기억의 공간임을 알려준다. 차경희의 존재론적인 풍경 앞에서 우리는 오래 잊었던 기억과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조용한 재회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터, 지속된 시간]

우리가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면, 죽음마저도 그 사랑에 빠져서 자기의 임무를 그만 잊어버리고, 소멸시켜야 하는 그 사람을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남겨놓는 건 아닐까. 그것이 사진 이미지가 아닐까.” [김진영_‘조용한 날들’ 중 발췌]

[터, 지속된 시간]은, 먼저 떠난 동생의 죽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죽음은 일상에서 한 걸음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우연한 사건이었다. 이젠 그리움으로 머물 뿐이지만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은 기억 속에 또 다른 존재로 머물러 죽음은 사라짐이 아닌 ‘살아 있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에선 무엇이 보였을까. 그 눈에 우리가 사는 집이 보였을까.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나는 ‘죽은 자가 살고 있는’ 그 흙을 품은 곳, 자연 풍경으로 향하였다.

[터, 지속된 시간]의 촬영을 시작하면서 각 지역의 자연 풍경과 생활 공간 그리고 죽음의 공간이 하나로 어우러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 속의 대상 가운데 어느 하나만 주목하기보다는 모두를 공평하게 보여주는 위치에서 관찰하고자 하였다. 낱낱의 대상에게 이끌리지 않고, 자연의 미세한 실핏줄까지 들여다봄으로써 그에 순응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계절을 단아한 색으로 재현하여 자연과 산 자의 생활 공간 그리고 죽은 자의 거처인 무덤을 하나로 아우르고자 하였다. ‘터’는 죽은 자의 거처와 산 자의 생활 터전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무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매개체가 된다. [터, 지속된 시간]은 자연 풍경을 통해 삶과 죽음,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경계나 단절이 아닌 지속의 관계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자 했다. 2013
The Ground’

“It might be that if we love someone beyond measure, then even death falls in that love and forgets his own duty, leaving the person whom he ought to perish alive, as vividly as the person was in his lifetime. And this might be what you call the photographic image.”[Excerpt from Kim, Jinyoung’s “Silent Days.”]

The series named “The Ground” began with my effort to comfort myself after losing my sister. His death was an accident that taught me that how to take a step forward in everyday life could determine life and death. I have no choice but to miss the time that we shared together, but on the other hand, it remains in my memory as a different being, telling me that death is not disappearance but another form of ‘being alive.’ What was it that was shown to her lying in her last bed? Was our house seen by her eyes? When man dies, he returns to the dust. I left for the natural landscape that includes the dust in which ‘the deceased is living.’

During working on this project, I found that the natural scenery, living space, and the space of death in each region are joined together as one. In this sense, I tried to observe the objects in nature from the point where I could show them equally, rather than to focus on only one of them. I was attracted by none of them. I just looked into and conform to every capillary vessel of nature. And by representing the four seasons in elegant colors, I tried to unite nature, the living space of the survivors, and the grave as the residence of the dead. In my works, the term ‘Ground,’ here, means both the abode of the deceased and the place of living, and the grave placed in ‘Ground’ works as a mediator between the living and the dead. This series, “The Ground, ” was intended to show that life and death, or the world of life and that of death, are neither separated nor walled; but rather, there is a continuation between them, for both are living together by picking out their own ‘Ground.’ 2013.
[터, 지속된 시간] 먼 시선 혹은 무덤의 연금술

김진영 _ [예술비평], (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장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은 무덤 사진들이다. 무덤이 사진의 주제가 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주제 의식으로 무덤을 찍는 사진들은 그 동안에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무덤을 렌즈로 포착하는 차경희의 시선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그녀는 무덤을 근접 촬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 한 먼 시선으로 무덤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다. 그 먼 시선 안에서 차경희의 무덤들은, 여타 무덤 사진들과는 다르게, 돌출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공간의 전부를 차지하는 풍경들 속에 묻혀 있거나 스며 있다. 그녀는 말하자면 먼 시선을 통해서 주제를 의도적으로 탈주제화 한다. 그런데 그 ‘탈주제화’의 시선은 주제 의식만이 아니라 사진 공간을 다층화하려는 프레임 구성 의식의 결과인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차경희의 사진 공간은 그러한 탈주제화의 시선을 통해서 주제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변증법적 공간이 되며, 그 복합적인 공간 안에서 무덤들은 단순한 시각적 주제를 초과해 꼼꼼히 읽어내야 하는 다의적 기호로 변하기 때문이다.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을 이해하는 일은 다름 아닌 이 기호의 다의성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경희의 무덤 기호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는 것 일까.

나는 우선 존재론적 관점으로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읽는다. 그랬을 때 주목을 끄는 건 생과 사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녀의 새로운 시선이다. 차경희의 시선 안에서 무덤은, 흔히 그렇게 생각되듯이, 죽음의 거처나 생의 외부가 더 이상 아니다. 무덤은 오히려 생의 내부로 들어와서 생이 겪는 모든 일들을 함께 겪는다. 생이 계절을 지나가듯이, 무덤은 복숭아꽃 피는 봄을, 눈 쌓인 겨울을 지나가며 겪는다. 또 생이 모든 공간 안에 편재하는 것처럼, 무덤 또한 혹은 들판에, 혹은 바닷가에, 혹은 누군가의 집 곁에서 거주한다. 심지어 무덤은, 예컨대 길 한편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무덤은,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창 밖으로 지켜보는 것 같다. 하지만 차경희의 무덤 사진들의 존재론적 특별함이 다만 무덤이 생 안으로 내부화되는 사실에만 있는 건 아니다. 조금만 더 깊이 응시하면, 풍경 속에 사소한 디테일로 소속된 것 같은 무덤은 오히려 풍경의 중심인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산 안개의 연무가 태곳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이미지들 안에서, 풍경들은 무덤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무덤으로부터 생성되고 있다는 연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차경희의 무덤 사진이 존재론적이라면, 그 존재론은 역설적이다.

다음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사진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응시한다. 그럴 때 먼 시선으로 포착된 무덤은 ‘애도’의 기호로 읽힌다. 그 개념을 정립한 프로이트에게 애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상실의 슬픔이 다시 생으로 귀환하는 리비도 운동, 즉 사랑하는 죽은 사람과의 건강한 이별을 의미한다. 하지만 차경희의 무덤들은 그와는 다른 애도, 프로이트가 아니라 프루스트적인 애도와 더 가까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프루스트에게 애도는 죽은 자와의 이별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안에 내포시키는 기억 작업, 말하자면 죽은 자를 땅속의 무덤이 아니라 마음의 무덤 안에 묻어 간직하는 일이다. 차경희의 무덤 기호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 오롯이 내포되어 생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듯한 차경희의 무덤들은 이별과 망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지 않고 생 안에 간직하려는 추억과 불망의 이미지를 더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이 애도 사진이라면, 그녀의 무덤들은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자기 안에 스스로 지어놓은 마음의 무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사진 이미지 자체에 대한 메타이론적 관점으로 읽는다. 사진과 무덤 사이의 내밀한 관련성에 대하여 누구보다 천착했던 사람은, 잘 알려져 있듯 R. 바르트다. 바르트에게 사진은 죽음과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는 이미지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다 (‘사진의 아이도스는 죽음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대상을 시체처럼 정지된 죽음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진은 ‘죽은 자의 귀환’이다. 인덱스 이미지인 사진은 ‘그때 거기에서 살아 있었음’을 기록하는 이미지, 보는 이의 시선 안에서 그 ‘살아 있었음’ 이 되돌아오는 과거 생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차경희의 무덤 기호를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는 시니피앙으로 읽게 만든다. 차경희는 무덤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러면서 무덤 공간을 사진 공간으로 재현한다. 이 재현은 그러나 다만 대상이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경희의 [터, 지속된 시간] 이 애도 사진이라면, 그 사진적 행위 안에는 애도의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내포된다. 사진이 살아있는 과거의 공간이라면, 사진이 된 무덤은 이제 죽음과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살아 있어 현재로 귀환하는 마술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차경희의 사진 행위는 무덤을 죽은 자의 거처가 아니라 산 자의 거처로 바꾸려는 연금술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덤과 사진의 연금술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건 아니다. 그건 자기 마음 안에 무덤을 짓고 죽은 자를 그 안에 간직하는 사랑의 시선으로만 가능해지는 연금술이기 때문이다. 차경희의 사랑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다.
‘The Ground’ A Long-distance Gaze or the Alchemy of a Grave

Kim, Jinyoung Art Critic, Chairman of the Standing Committee of Academy of Philosophy

The series titled [The Ground] by Cha, Kyounghee features photographs of graves. It is not uncommon for photographers to choose graves as their subject matter, for so many photographs of graves have been so far taken with various themes. Nevertheless, there is still something unusual in this photographer’s eye capturing the image of graves with the lens. She does not shoot them at close range: rather, her subjects are photographed from a distance as long as possible. The graves trapped by that long-distance gaze are almost covered by or sink into the landscape filling up the entire frame, not standing out as in other pictures of graves. In other words, she intentionally ‘De-subjectizes’ the subject with the long-distance gaze. This gaze of de-subjectification seems to closely relate to the artist’s unique way of not only approaching the subject, but also composing the frame—that is, how to make the photographic space multi-layered. The gaze, in her pictures, transforms the photographic space into a dialectical one in which the subject is at once covered and revealed and therefore, in this complicate space, her graves go far beyond the level of a mere visual subject to become a polysemous sign that requires careful reading. In this sense, the understanding of this photographic series would be a matter of understanding of this polysemy of her sign. Then, what does this sign of a grave mean?

I would like to first read her pictures of graves from the ontological perspective. And I am attracted by her new gaze on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life and death. In her gaze, the grave is no longer the abode of death, or the outside of life, as is commonly believed. Rather, it comes into the very inside of life and experiences all that life undergoes. As life goes passes the seasons, so the grave passes spring with peach blossoms pink on the branches, and winter covered with snow. As life is present in all spaces, so the grave is also domiciled in a field, on the seashore, or near someone’s house. Occasionally, for example, a grave, placed on the top of a slope on one side of the road, looks like a house built by someone who is living there and watching passersby through the window. Nevertheless, the ontological peculiarity of these photographs does not found only in the internalization of the grave in life. With a closer look at them, you may found that the grave, looking like a trivial detail in the landscape, shows itself as a dominating element. The images, in which the screen of the mountain mist evokes the ancient memory, may lead you to think, not that the landscape includes the grave, but that the former is being created from the latter. If these pictures could be regarded as ontological, it is a paradoxical ontology.

Next, I look at her pictures of graves from the psychoanalytic perspective. And the graves captured by her long-distance gaze read as the sign of ‘Mourning.’ Freud, who rounded out the concept, explains mourning as the libidinal movement in which the grief of bereavement, or losing a loved one, gradually returns to life and completes healthy detachment from the deceased. However, the photographer’s grave seems to be connected with some other type of mourning: it seems closer to Proustian mourning than to Freudian one. For Proust, mourning is not to achieve a parting from the deceased, but the work of memory to incorporate the deceased within it for the purpose of not forgetting him, or to put it another way, burying him not in the grave under the ground but in that in the heart. Cha’s sign of a grave carries out the similar function. Her graves that seem to become entirely part of nature, living together with the living in the time and space of life, resemble more the image of recollection and forgetfulness to keep the deceased in our life, than that of parting and oblivion. If [The Ground] is mourning photography, her graves would not to be found in natural space but be the ones in her heart that she personally built inside of herself.

Finally, I read Cha’s sign of a grave from the meta-theoretical perspective that deals with the photographic image itself. As is widely known, it was Ronald Barthes who delved into the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the photograph and a grave more than anyone else. He understands the photograph as the image that has a double relationship with death. The photograph is essentially the image of death (“death is the eidos of that photograph”), for it is the result of transforming what is living and moving into the image of death, as still as a dead body. On the other hand, it also represents the ‘Return of the dead’. The photograph as an indexical image is the visual record of ‘Being alive then and there’, or the image of the reviving past, or the return of ‘Having been alive then’ in the gaze of the beholder. This persuades us to read Cha’s sign of a grave as a signifier that implies another special meaning. The photographer takes pictures of graves, and by doing this, she represents the grave space as the photographic one. This representation, however, does not simply mean the conversion of the object to the image. If [The Ground] is mourning photography, her photographic practice will have another special meaning. This is because, if the photograph is the space of the living past, the grave that turned into a photograph is no more the space of death and recollection, but a magical space in which the dead is still alive and returns to the present. In a sense, her photographic behavior may be described as the practice of alchemy to change the grave into the abode of the living, not that of the dead. But this alchemy of grave and photography is not allowed to everyone. It is only the gaze of love to build a grave in the heart and keep the deceased in it that makes the alchemy possible. The photographer’s love seems to be still ongoing.
[터, 지속된 시간] 차경희, 흙을 먹고 사진을 토하다.

이영준_ [기계비평가], 계원 디자인 예술대학 교수

인간은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땅을 떠나려고 비행기, 우주선, 배를 만들었지만 거기에는 항상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땅을 밟고 있어야 하는 운명을 거스르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 하기 때문에 위험이 닥치는 것이다. 땅은 인간이 태어난 모태이다. 인간은 발로 땅을 밟고 있지만 사실 발로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땅이 개미 같은 인간을 받쳐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만해진 인간은 땅의 분신인 흙을 함부로 다룬다. 함부로 다루는 정도가 어니라 혐오하고 내쫓으려 든다. 구두에 흙이 묻으면 돈 들여서 닦아버리고 실내는 물론 심지어 길에 흙이 묻어 있어도 싹싹 닦아 없애버린다. 마치 흙이 해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듯 말이다.
흙과 땅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래선 안 된다. 흙은 어차피 우리가 죽으면 돌아갈 미래의 집 아닌가. 흙과 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입주 일이 한참 남았다고 내 아파트를 더럽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흙에서 나왔다. 흙과 땅은 우리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입으로 먹으면 퉤퉤 하고 뱉어내니까 눈으로 먹는다. 본다고 하지 않고 먹는다고 한 이유는 ‘흙-이미지-존재 혹은 신체’로 이어지는 관계가 눈에 의해 긴밀하게 매개돼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 훑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깊이 관계 맺는 것이다. 즉 내가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내 삶은 거기 영향을 받아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의 피 흘리는 장면이 완전히 가짜임을 알아도 보는 이는 그것을 끔찍하게 여기며 진저리 치는 이유는 눈으로 본 가짜 피와 가짜 죽음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 삶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상을 내 것으로 소화해버리는 동일시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작용이다. 인간이 잘나서 대상을 파악하고 이름 붙이고 정리해서 지식으로 만들어 동일시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대상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우리가 흙을 볼 때도 흙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우리는 흙을 보면서 흙인간이 된다. 아니, 원래부터 흙이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흙을 촌스럽고 구차하게 여기는 도시인들은 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잔디를 심어놓고 잔디인간이 되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마당에 잔디를 곱게 깔아놓고 즐기는 서양식 잔디인간이 되려고 한다. 한국 사람도, 서양 사람도 본래는 흙인간이었다. 아니, 흙인간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흙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콘크리트 위에 살면서 그런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흙인간이다.
우리가 흙을 볼 때 거리를 두고 시선으로 훑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렁이가 아니기 때문에 설사 흙을 먹는다 해도 직접 몸 안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시각성이라는 매개를 쓴다. 아무리 흙을 밟고 사는 것이 좋다 한들 도시인의 경우 항상 맨발로 다닐 수는 없다. 기껏해야 잠깐이다. 여름에 해변에서 맨발로 모래 위를 걷는 것, 혹은 지압 효과가 있다고 하여 산에 가서 잠깐 맨발로 걷는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지저분하게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멀찍이서 관조한다.
반면, 시골 사람들은 온몸으로 땅을 받아들인다.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시골분들이 올라탈 때 몸에서 땀과 흙이 섞인 냄새가 날 때가 있다. 도시 사람인 나는 얄궂게도 그 냄새를 맡으며 촌스러움, 낙후함, 원시성 등 온갖 부정적인 함의를 떠올린다. 사실 떠올린다기보다는 그런 함의의 그물을 시골분들에게 덮어씌우고는 나는 도회 사람이라고 물러앉아 거드름을 피운다. 그런데 시골분들에게 그런 냄새가 나는 이유는 흙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냄새는 흙인간의 존재의 증거이다. 도회 사람들이 샴푸인간, 로션인간일 때 시골분들은 흙인간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분들에게는 풍경화가 필요 없다. 이미 몸 안에 풍경이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시골사람들이 즐기는 소위 이발소 그림은 사실 풍경화가 아니다. 흙 자체가 풍경화가 아니듯이, 이발소 그림은 시골 사람들이 흙을 대하는 태도의 일부이다. 풍경화란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태도를 필요로 하는데, 이발소 그림에서는 뒤에는 스위스 알프스 산이 있고 앞에는 충청북도의 물레방아가 있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가 등장한다. 이 판타지는 허상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이 먹고사는 시각적 음식이다. 그들의 밥상에는 열무김치와 된장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판타지도 올라와 있다. 그들은 그 그림을 보면서 알프스에 갈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보는 그림’으로 인식할 뿐이다. 뒷산에 소나무가 있듯이 이발소에는 이발소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런 취향이 도회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분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증명한다. 그 냄새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면 나도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설악산 십이선녀탕에서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을 때 그랬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촌스러움, 낙후함의 함의가 있는 어떤 감각적 인상도 받지 못했으며, 그분들과의 대화는 맑은 샘물을 떠 마시듯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대화라고 해봐야 뭐 캐러 다니시냐는 둥, 잠은 어떻게 주무시냐는 둥, 십이선녀탕 다음에는 널협이골로 가시는 거냐는 둥의 자못 사이비 인류학자 같은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산행을 통해 나도 어느덧 땅이 되었기에 나는 그 아주머니들에게서 어떤 촌스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흙은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사진가는 항상 거리를 두는 습관이 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의 대리자 혹은 증언자로 카메라를 채용하면서 흙을 대한다. 사용이라고 하지 않고 채용이라고 하는 이유는 카메라를 단순히 도구로 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많이 찍어본 사람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고장나거나 필름 혹은 메모리 카드가 없어서 낭패를 본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 단순한 사태가 낭패인 이유는 우리의 잘난 존재가 그 하찮은 메모리 카드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우주로 가기 위해 복잡한 우주선을 타는 것만큼이나 대상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생존 방식이다.
차경희는 우리가 언젠가 돌아갈 집인 무덤과, 그 집의 터전인 땅을 찍는다. 이때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진이 너무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맹수조차 사냥할 때 숨을 죽이고 먹잇감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경희는 풍경을 대할 때 조심하는 편이다. 몸과 카메라에 흙이 묻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묻힌다는 것은 나의 외부에 어떤 것이 달라붙어 이질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하는 상태를 말한다. 묻히지 않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묻은 것을 털어내는 것, 즉 묻은 것의 이질성은 놔둔 채 아예 제거해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묻은 것에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다. 차경희는 후자의 방법을 택한다. 그렇다고 흙 속에 마구 뒹굴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온몸에 묻히면 안 되고 입을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흙을 묻히는 데도 적절한 방식이 있다. 차경희는 그것을 하나의 리추얼로 만들어 사진을 찍는다. 그녀의 사진에는 무덤이 나오는데, 꼭 무덤을 찍어야만 하는 개인적인 사정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전면에 주인공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흙의 일부일 뿐이다.
흙은 분명히 우리 존재의 고향으로서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범위에서 무시돼왔다. 아마 고매한 사상가치고 존재의 근원을 얘기할 때 흙을 말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흙은 항상 발 아래에 밟히며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 토양의 오염을 막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지식들과 방법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흙이 마냥 지식의 진공상태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차경희는 흙을 시각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풍경의 일부로서 끌어들인다. 그의 사진에는 나무와 풀들, 지형과 장소성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의 토대는 흙이다. 그 사진들은 흙을 잊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다. 매우 조용하게. 그 사진들은 풍경 사진이면서 풍경 사진이 아니다. 풍경이란 자연을 프레임에 넣어 관조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차경희의 사진은 흙과 땅으로 다가가기 위한 통로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풍경 사진에 들어 있는 건방짐을 극복하고 있다. 왜 풍경 사진이 건방질까? 관조란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판단은 괄호 속에 넣고 조용히 보는 것이다. 그러나 풍경을 관조하는 우리의 머릿속은 맑게 비어 있지 않다. 온갖 쓸데없는 사상과 이념들이 시선을 재단한다. 왜냐하면 평생 풍경에 대해 배워온 것이 많기 때문이다. 차경희는 그런 것들을 괄호 속에 넣고 흙이 다가오게 만든다. 그 사진들을 통해 우리도 흙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흙 냄새에 얽힌 촌스럽고 투박하고 문화화되지 않은 온갖 부정적인 함의들은 사라지고 흙을 우리 곁에 둘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 사진들에서 흙의 외피인 나무와 풀, 심지어 하늘과 물 조차 흙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겸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봉분이 거의 깎인 탓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봉분을 낮게 쓴 것인지, 땅과 거의 같아져 버린 두 기의 무덤 위로는 초봄의 파릇한 풀들이 나 있는 작은 둔덕이 있고 그 위로 매화가 피어 있다(표지 사진). 매화의 고장 광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충청북도 괴산이라고 한다. 어쩌면 흙은 그만큼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양이면 어떻고, 괴산이면 어떤가 말이다. 매화는 항상 매혹적인데. 그런데 그 사진의 5분의 2쯤은 회색 하늘이 채우고 있다. 땅과 그 위의 외피들을 찍는 거였다면 그렇게 하늘을 많이 넣을 이유는 없다. 지금 보이는 하늘의 반 이상을 잘라낸다고 해도 아무로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은 잘라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도시의 마천루는 하늘을 마구 잘라내 버려서 우리는 저녁 노을도, 제비도 볼 수 없게 됐지만 땅과 흙에 대해 겸손한 사진가 차경희는 하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하늘도 흙만큼이나 소중하지만 사상가들의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아마 하늘의 철학이라는 것을 펼친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차경희만이 하늘의 철학자다. 그녀는 하늘을 존중하며 조심스레 사진 속에 초대한다. 이 사진에서 하늘은 피사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진을 있게 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어머니란 나를 있게 해준 존재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배신하고 못살게 군다. 하늘에 대해서도 그래 왔다. 차경희는 그런 잘못된 역사를 이 사진으로 뒤집는다. 이 사진은 하늘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사진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나 붉은 저녁 노을이 물든 하늘 등 뭔가 극적인 함의를 가진 하늘도 아니다. 희뿌연 구름이 끼어서 회색빛이 가득하고, 대지마저 회색으로 가득 채우는 퍽퍽한 하늘이다. 가장 함의가 없는 하늘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하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가 판단하기 전부터 거기 있었으므로. 이 사진은 그 넓고 큰 하늘에 대해 인간이 뭐라고 말들을 갖다 붙이는 그 담론과 내러티브의 건방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왜 쓸데없이 회색 하늘을 이렇게 많이 사진에 넣었느냐고 물었으나 그 물음은 이내 쓸모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나 자신도 하늘에 대해 쪼잔한 담론으로 판단하고 있었음을 알고 겸연쩍어질 뿐이다.
그러고 보면 차경희의 사진에는 하늘이 참 많이 나온다. 그래서 하늘의 반복 앞에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복이란 더 안 나타나도 되는데 자꾸 나타나서 지겨운 것이다. 그리고 그 지겨움 속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반복이다. 그러나 하늘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넓게, 땅보다 넓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편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이다. 옛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그런 하늘이 사진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어떤 존재가 항상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듯이 하늘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흙과 하늘 사이에 끼어 있는 온갖 자잘한 것들의 의미는 뭘까? 수많은 풀들, 돌들, 안개, 나무들이 사진에 나온다. 사실은 흙과 하늘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생태계라는 정교한 조직을 이루는 요소들이며, 그중 어느 것 하나만 없어져도 생태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인간의 인식론적 폭력이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라는 식으로 생태계의 요소들을 무시해왔을 뿐이다. 차경희의 사진은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소중하다고 외쳐서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사진으로 보여줘서 일깨운다. 말없이 대지에 서서 한참을 응시하고는 카메라를 설치하여 찍는 조용한 태도를 통해 작은 사물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차경희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흙과 하늘만이 아니라 사진에 나오지 않은 것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게 된다. 지렁이가 하늘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차경희 車慶姬 Cha, kyounghee

학력
2008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 순수사진전공 석사졸업
2005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순수사진전공 졸업
2003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다큐멘터리전공 졸업

개인전
2015 터, 지속된 시간, 미르아트홀, 진주
2014 시대의 얼굴, 멜랑콜리, 스페이스 22 갤러리, 서울
2013 생의 터 사이의 공간, 토요타 포토 스페이스, 부산
2013 터, 지속된 시간, 갤러리 룩스, 서울

단체전
2014 생활사 박물관 프로젝트, 사람이 보물이다!, 경기문화재단, 문화쌀롱 공, 경기도 평택
2014 일어나라 사진비평!, 스페이스 22, 서울
2009 사진비평상 10주년 기념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9 21C 뉴실크로드전, 주중한국문화원, 북경, 중국
2007 중앙 미술제, 갤러리 현, 서울
2006 중국중앙민족대학 교류전, 민족대학교 미술관, 중국
2005 제 7회 사진비평 공모전 수상전, 룩스 갤러리, 서울
2005 View-point, 서신갤러리, 전주

수상
2014 서울문화재단 정기공모 예술작품지원, 서울문화재단
2005 제 7회 사진비평상 수상, 아이포스 포토 스페이스
2002 제 1회 대학사진공모전 대상수상, 빙그레

출판
2013 THE GROUND / FORESHORE (Sumin Book)

소장
2009 주중한국문화원, 북경, 중국
Cha, Kyounghee

(b. 1973, South Korea)
Education
2008 Masters of Fine Art in Photography, Graduate School of Chungang University, Seoul, Korea
2005 Bachelors of Fine Art in Photography, Chungang University, Seoul, Korea
2003 Photography, Paekche Institute of the Arts, Jeonju, Korea

Solo Exhibitions
2014 Faces of the Time, Melancholy, Space 22, Seoul, Korea
2013 The Ground, Gallery Lux, Seoul, Korea
2013 The Ground of Living, The Space of the Inbetween, Toyota Photo Space, Busan, Korea

Group Exhibitions
2014 Rise Sajinbipyong!, Space 22, Seoul, Korea
2009 10th Sajinbipyong Awards Exhibition, Seoul Museum of Art, Seoul, Korea
2009 21C New Silk Road, The Korean Cultural Center, Beijing, China
2008 The 809 International New Image Art Festival, Yichang, China
2007 Chungang Art Festival, Gallery Hyun, Seoul, Korea
2007 Portraits of the Big Cities - Seoul Guarantee Insurance Co., Ltd. Seoul, Korea
2006 Central University for Nationalities Exchange Exhibition, Museum of Art Central University for Nationalities, Beijing, China
2005 View-point, Seoshin Gallery, Jeonju, Korea
2005 Sajinbipyong Awards Exhibition, Gallery Lux, Seoul, Korea

Grants / Awards
2014 The Seoul Creative Engagement with the Arts (SEA) program, Seoul Foundation of Arts and Culture, Seoul, Korea
2005 The 7th Sajinbipyong Awards, Iphos Photo Space, Seoul, Korea
2002 The 1st National College Photo Contest, First Prize, Bingrae, Korea

Publication
2013 THE GROUND, Sumin Book (ISBN: 979-11-85077-26-0 93660)

Collection
2009 Korea Center for Korean Embassy, Beiji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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