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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2015. 7. 17 ~ 7. 31
전시장소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 Seoul
갤러리 주소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 390번지 미진프라지빌딩 22층(02-3469-0822)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space22.co.kr
참여작가 김은주, 김정언, 박세리, 박세희, 송미영, 송호철, 윤은자, 이민호, 장화경, 최광호
관람시간 월~토 11:00~19:00 |공휴일 휴관
재현이 불가능한데도 표상에의 욕망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 슬픔, 기쁨, 이별과 같은 감정들이 그러하고, 번역될 수 없는 단어인 ‘멜랑콜리’와 드러나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만 숨 쉬는 ‘징후’가 그렇다. 그런데 보편의 가지런한 일상에서 이탈해 창작자/향유자로서 감각의 표면적이 넓어질 때는 대략 이러한 단어들과 함께 할 때이다. 늘 보았던 사진이 오늘 따라 달리 보이거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면이 드러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불이 밝혀질 때, 혹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안의 검은 대륙이 꿈틀거릴 때. 이런 난데없음과 이해불가하고 번역하기 어려운 상황들과 직면하는 시간이 많다면 그는 분명 검은 담즙이 많은 고독한 자일 것이다. 명랑한 고독. 그 속에서의 자유는 한층 깊고 유연하게 펼쳐질 것이기에 되도록 자주, 가능하다면 많이! 낯설고 기이한 사건들에 휘말려보기를 권유한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베냐민의 ‘정지의 변증법’속에서, ‘존재의 공백’(바디우)을 드러내는 어떤 ‘사건’들은 결국 멜랑콜리커들이 발산하는 징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멜랑콜리이고, 징후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중의 하나인 자유조차 꽉 짜인 상징코드 속에 갇혀버린 지금, 자유를 다시 부르기 위해서 멜랑콜리와 징후 속으로 즐겁게 들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이다.
  • ⓒ김은주
  • ⓒ김정언
  • ⓒ박세리
  • ⓒ박세희
  • ⓒ송미영
  • ⓒ송호철
  • ⓒ윤은자
  • ⓒ이민호
  • ⓒ장화경
  • ⓒ최광호
재현이 불가능한데도 표상에의 욕망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 슬픔, 기쁨, 이별과 같은 감정들이 그러하고, 번역될 수 없는 단어인 ‘멜랑콜리’와 드러나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만 숨 쉬는 ‘징후’가 그렇다. 그런데 보편의 가지런한 일상에서 이탈해 창작자/향유자로서 감각의 표면적이 넓어질 때는 대략 이러한 단어들과 함께 할 때이다. 늘 보았던 사진이 오늘 따라 달리 보이거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면이 드러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불이 밝혀질 때, 혹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안의 검은 대륙이 꿈틀거릴 때. 이런 난데없음과 이해불가하고 번역하기 어려운 상황들과 직면하는 시간이 많다면 그는 분명 검은 담즙이 많은 고독한 자일 것이다. 명랑한 고독. 그 속에서의 자유는 한층 깊고 유연하게 펼쳐질 것이기에 되도록 자주, 가능하다면 많이! 낯설고 기이한 사건들에 휘말려보기를 권유한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베냐민의 ‘정지의 변증법’속에서, ‘존재의 공백’(바디우)을 드러내는 어떤 ‘사건’들은 결국 멜랑콜리커들이 발산하는 징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멜랑콜리이고, 징후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중의 하나인 자유조차 꽉 짜인 상징코드 속에 갇혀버린 지금, 자유를 다시 부르기 위해서 멜랑콜리와 징후 속으로 즐겁게 들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이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 될 여성사진페스티벌의 사전 행사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멜랑콜리의 징후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닌 엿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사유하고자 정신 분석학적 접근방법을 택해보았다. 전시의 부제인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의 타이틀에서 가져왔다. 다소 과격한 명령조로 징후를 즐기라고 말하는 지젝의 의도는 그동안 억압되어 왔었던 것들의 인덱스를 좇아가며 존재론적인 출구를 제시하는데 있다. 하지만 예정된 출구란 언제나 부재하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출구란 이처럼 징후적인 형태-흔적이거나 유령, 희미한 기억 혹은 꿈-로만 있을 뿐이다. 이렇듯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징후이고, 그렇기에 조형예술에서 징후를 재현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만일 재현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안고 오히려 창조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어떠한 과정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사이에 여성성이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 즉, 재현과 재현할 수 없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에로스와 타나토스, 가상/꿈과 현실, 전체와 비 전체의 경계가 와해된 곳이 여성성이 자리하는 곳이 아닐지, 만일 재현-구원이 가능하다면 비로소 그 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말로 번역이 불가능한 ‘멜랑콜리’도 사실은 재현이 불가능한 그림자의 영역이다. 견고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화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사진에서 멜랑콜리는 어떠한 ‘징후’로만 드러난다. 징후(혹은 증상, 영어로는 symptom, 프랑스어로는 symptôme)의 어원을 좇다 보면 sin(죄), home(집), Saint homme(성자) 등에 닿게 된다. 다양한 의미망을 갖는 ‘징후’는 의학에서는 병의 인덱스로, 정신분석에서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증상의 지표로 간주한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징후는 구조를 반영하는 일종의 기표로 작용하고, 현대의 사진가들은 멜랑콜리의 징후(은유)들을 찾아 나선다.

전시의 첫 번째 파트인 '멜랑콜리아’에서는 실재와 부재의 기표를 최광호, 박세리, 박세희의 작업을 통해 살펴본다. 카메라가 없이도 만들어지는 사진인 최광호의 포토그램photogram은 사진의 지표성을 잘 보여준다. 반드시 실체가 있어야하고, 그 실체의 자국으로 생긴 것이 포토그램이기 때문이다. 크라우스의 말대로 “포토그램은 모든 사진에 적용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거나 명확하게 한다. 모든 사진은 빛의 반사에 의해 감광면 위로 옮겨진 물리적 자국의 결과다.” 분명히 있었던 것의 흔적이 포토그램이고 1974년부터 포토그램 작업을 지속적으로 발표 해 온 최광호의 작품을 통해 사진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잠자는 사람들의 포트레이트를 촬영한 박세리의 작품은 잠과 죽음의 시각적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사후사진postmortem photography이 모티브가 된 이 작업은 밤-잠-쉼의 시간대를 밀도 높게 선보인다. 그런가하면 박세희는 사진-거주지를 소각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며 생성과 소멸, 정주와 이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것은 뜨거움과 차가움, 타오름과 꺼짐, 사랑과 이별,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라는 넓은 의미의 자장을 형성한다. 이처럼 ‘멜랑콜리아’에서는 깊은 우울에 이른 세 작가의 작업을 통해 사진에서의 흔적, 잠과 죽음, 생성과 소멸에 대해 사유해보고자 했다.

두 번째 파트인 ‘사진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는 사진의 신화 중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증명, 기록, 역사’에 대한 사유를 끌어올린다. ‘증명할 수 없는 증명사진’의 이민호, 역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증명’을 사진으로 시도하고 있는 김은주의 초상사진, 역사의 시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서울의 한 동네를 보여주고 있는 송호철의 작업 등 사진에 끈질기게 잠복한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에 흠집 내기를 시도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묶어 보았다. 증명사진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역사가 기록해낸 것은 모두 사실인가? 증명사진과 역사가의 기록,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데에는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굳어진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 개의 물음표를 제시한다.

전시의 세 번째 파트인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는 여성의 시간과 공간, 꿈과 현실, 드러난 정체성과 숨겨진 무의식의 경계를 형상화하고자 한다. 김정언, 장화경, 윤은자, 송미영은 각각 도플갱어, 갱년기, 판타지, 탯줄을 키워드로 접근했다. 나와 내 안의 타자로서의 나, 나와 갱년기로서 나, 나와 판타지, 나와 엄마-바다로 이어지는 탯줄. 이 네 개의 표지는 여성성으로서의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결여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상상적 동일시와 판타지는 필요한 위안이다. 나와 타자, 주체와 대상간의 이분법적인 구분의 위태로움 속에서 시원의 바다-탯줄로 되돌아가듯이. 여성의 자리가 대개 죄책감으로 드러나거나 방어적 차원이 도드라졌다면 세 번째 파트의 여성작가들이 선보인 징후들은 바스락거리는 멜랑콜리커들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본격적인 ‘여성사진페스티벌’을 앞두고 기획된 [멜랑콜리아,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멜랑콜리의 아름다운 가능성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상징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전체가 아님(not-all)이 가져올 비결정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의 실재를 이 작은 전시에서 사유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 행사에 앞서, 반드시 ‘미리(프레pre)’ 해야만 할 정언명령이기도 했다. 지젝이 ‘즐겨라!’로 책의 타이틀을 끝맺은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재현되지 못했던 것들의 가능성을 다음으로 연기하며.
글 : 최연하 (pre 여성사진페스티벌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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