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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19:41

최재용 MANDOO 사진전

조회 수 234 추천 수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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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80년 만의 歸鄕 _ 정조문의 집
전시기간 2015. 6. 2 ~ 6. 28
전시장소 복합문화공간 에무 Multipurpose Art Hall EMU, Seoul
오프닝 2016.6.6 (토) 오후 2시
갤러리 주소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7(신문로2가 1-181) (02 730 5604)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emuspace.co.kr
기타 ▶오프닝 행사
▸1부 : 오후 2시 –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 후원 시사회
▸2부 : 오후 4시 - 해금 신날새, 기타 정영호, 피아노 정진희
/ 거문고 강혜진, 타악기 최영진 콘서트 <정조문의 집>
▸3부 : 오후 5시 - 장천 김성태 퍼포먼스와 사진전 오프닝

▶전시 기간 부대 행사
▸以心傳心 학술포럼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 제작과정과 의의’
(유료 5,000원)
- 9일: 작가 (최강희 영화평론가)
16일: 감독 (황철민 세종대 교수)
23일: 제작자 (최선일 미술사학자)
조선 문화재 수집가인 재일교포 정조문(1918~1989).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출신으로 1924년 6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갖은 고생 끝에 파칭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조선 백자를 구입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 시바 료타로,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같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며, 도처에 산재해 있는 조선의 귀중한 유물들 약 1,700여점을 수집해, 일본의 古都인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척박한 일본 땅에서 집념과 의지 하나 만으로 조선의 얼을 지켜내고자 했던 재일교포 정조문의 삶을 추적하고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여 만인 2013년 초, 미술사학자인 최선일 박사의 주도로 황철민 감독(세종대학교 영화학과 교수)와 최광희 영화 평론가가 뜻을 모아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를 제작했고,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조금씩 정조문과 그가 일본에 남긴 소중한 유산인 [고려미술관]을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 ⓒ최재용 MANDOO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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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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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 ⓒ최재용 MANDOO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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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
조선 문화재 수집가인 재일교포 정조문(1918~1989).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출신으로 1924년 6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갖은 고생 끝에 파칭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조선 백자를 구입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 시바 료타로,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같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며, 도처에 산재해 있는 조선의 귀중한 유물들 약 1,700여점을 수집해, 일본의 古都인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척박한 일본 땅에서 집념과 의지 하나 만으로 조선의 얼을 지켜내고자 했던 재일교포 정조문의 삶을 추적하고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여 만인 2013년 초, 미술사학자인 최선일 박사의 주도로 황철민 감독(세종대학교 영화학과 교수)와 최광희 영화 평론가가 뜻을 모아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를 제작했고,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조금씩 정조문과 그가 일본에 남긴 소중한 유산인 [고려미술관]을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년, 한일수교 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 특히 최근 들어서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 해외의 우리문화재환수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현재 [고려미술관]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으로 인해 특별전과 교육프로그램 등 기존활동을 접어야할 상황에 처해 있다.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한국과 일본의 숱한 박물관에 비하면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정조문의 [고려미술관]은 초라해 보일런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반드시 지켜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진전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은 전 재산을 털어 일본으로 유출된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는 데 일생을 바친 정조문의 흔적을 사진가의 시각을 통해 기록하고, 고려미술관의 가치와 그 존재를 우리 사회에 보다 널리 알리고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특별히 기획되었으며 지난 2014년 4월과 10월,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의 추진위원인 사진가 최재용이 교토를 방문해서 정조문의 유산인 [고려미술관] 곳곳을 돌아보며 담장, 작은 돌, 크고 작은 나무, 수많은 항아리들과 석상들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땀과 눈물, 의지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간송미술관의 화려한 컬렉션에 모두가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반해 일본 강점기에 차별과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한국의 유물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정조문의 노력은 우리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와 사진전 [80년 만의 歸鄕, 정조문의 집]을 계기로 문화재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정조문의 숭고한 뜻과 업적, 그리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초대사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내는 우리는 뿌리에 대해 종종 망각을 하고 사는 듯합니다. 지금의 나를 지탱할 과거가 없다면 미래의 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조문 선생은 재일동포 1세로 타국에서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조국을 망각한 적이 없습니다. 둘로 나뉜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했던 조국 땅을 잊지 않고 조선의 문화재를 모았습니다. 교토에 있는 자신의 집을 개조해 만든 [고려미술관]이 그 결실입니다. 소장된 미술 공예품 하나하나에 선생의 숨결이 담겨있고 민족의 긍지가 숨 쉬고 있습니다.
1988년 미술관을 개관한 4개월 후 선생은 타계했습니다. 선생은 방문객이 다섯 명밖에 안 된다고 지인과 상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문객이 연간 1만 명이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뜻있는 분들이 영화 제작을 하고 사진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를 우리 에무 공간에서 소개하고 전시할 수 있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더하여, 콘서트와 퍼포먼스로 이 행사를 빛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5. 6
복합문화공간 에무
관장 김영종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1989년 2월,
한 청년이 일본 교토의 이곳 저곳을 한가로이 배회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그 근방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한 재일교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지만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청년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당시 한국에서 그 교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아니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5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작년 이맘 때 쯤이다. 재일교포로서 파친코 사업으로 번 돈을 일본 내 조선 유물들을 끌어 모으는데 바쳤던 사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끝내 조국땅을 밟지 못했던, 아니 밟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정조문이라고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추진위원회에서 자발적 후원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가 눈을 감던 날 교토를 배회하던 청년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오랜 빚을 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나에게 받을게 없는 그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봄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4월,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의 추진위원들과 함께 벚꽃이 흐드러진 교토로 갔다.

담장의 울퉁불퉁한 돌덩이에, 수줍게 얼굴을 가린 석상에, 마당의 한 뭉텅이 이끼에
그가 있었다.

그를 모시고 왔다.
25년이 걸렸다.

사진가 최재용
최재용의 '80년 만의 歸鄕 - 정조문의 집'에 부쳐..

사람이 살다보면 개인적인 빚을 지기도 하고 사회적인 빚을 지기도 한다. 개인적인 빚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누군가에게 지는 빚을 말한다면, 사회적인 빚은 작게는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이나 지역 사회, 크게는 국가나 전 인류적인 차원의 빚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적 행위의 의식과 무의식을 떠나 가족이나 지역 사회, 또는 국가나 인류의 구성원으로 사는 동안 상호간에 자연스레 일어나는 삶의 형태로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며 살 수도 있고, 때로는 의식하지 않은 채 삶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 빚이 일반적인 도덕이나 상식과 관련이 있다면, 보다 큰 의미의 사회적 빚은 그런 차원을 넘어 전 인류가 그 자체로 하나처럼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자각이 일어날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재용의 '80년 만의 歸鄕 - 정조문의 집'은 다큐멘터리로서나 작품의 가치를 떠나 개인의 빚을 넘어선 사회적 빚에 대한 자각의 결실로 보여진다. 그것은 같은 피에 뿌리를 둔 같은 민족의 사정을 다룬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빚이 아닌 사회적 빚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단순하게 최재용의 사적 기억을 더듬어 작업을 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화적 산물'이나 '문명의 자산'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젊은 날의 기억이 단순히 개인적 기억에만 머물지 않고 개인을 넘어 이웃과 사회, 그리고 민족의 일원으로서 떠안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식으로 확대된 것이고, 그것이 ‘80년 만의 歸鄕 - 정조문의 집’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 사진전의 중요한 가치는 단순히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지나간 사실을 기록하는 차원이 아닌, 사회적 원인에 대한 개인의 날선 자각에 있다. 그 가치를 바탕으로 할 때 공적 다큐멘터리가 추구해야 할 지표는 분명해지고, 그것을 향한 사진가의 발걸음 또한 당당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재용의 ‘80년 만의 歸鄕 - 정조문의 집’을 통해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떠나 그 가치가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확장되는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2015. 6
사진가 김홍희
최재용 (MANDOO)

홍익대학교 판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청강문화산업대학, 숙명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백석예술대학, 동덕여자대학교 강사 역임
현재 YTN 홍보팀 차장 / 한국샐라티스트 협회 SAK 회장

개인전
2014 조선을 품다_정조문의 집 사진전, 예천문화회관, 조계종불교역사박물관 나무갤러리 기획초대전
2012 패밀리랜드 포토콜라주, 갤러리아우라 Flat 기획초대전
2011 패밀리랜드 포토콜라주, 김영섭 사진화랑 기획초대전
0000 홈테이블데코페어 부스개인전, 코엑스 C홀
2007 편집된 기억-건물 안 골목 사진전, 갤러리 나우 등 2회

그룹전
2014 제4회 샐라티스트 전 - 무면허예술가들, 갤러리 이마주, 서울
2013 제3회 샐라티스트 전 - 藝術賀世 , 갤러리 이마주, 서울
0000 2.5회 샐라티스트 전 - 나는 작업실로 퇴근한다, 갤러리 더페이지, 서울
0000 중아트마켓 전, 갤러리 중
0000 골목 전 Alley Sketch, 스튜디오 1129, 부산
2012 제2회 샐라티스트 전 - 샐러리맨으로 위장한 예술가들, 갤러리 아우라 등 50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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