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카페 갤러리]의 11번째 전시, 박노해 사진전 [카슈미르의 봄]展이 개최된다. [라 카페 갤러리]는 박노해 시인의 글로벌 평화 사진 상설전시가 열리는 곳으로, 비영리 사회단체 나눔문화가 운영하고 있으며 수익금은 평화나눔 활동에 쓰인다. 지난 2012년 4월부터 지금까지 파키스탄, 버마, 티베트를 비롯해 아프리카 수단과 에티오피아, 중남미 페루와 볼리비아 전시까지, 12평 작은 공간에 세계를 담아왔다.
이번 전시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 사진전이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다.”(무굴제국의 황제 제항기르) 만년설이 빛나는 히말라야 산맥 아래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는 카슈미르. 수천 년간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온 문명의 교차로이자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어우러진 평화의 땅이었지만, 1947년부터 시작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 분쟁으로 눈물의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도 인도군의 탄압 속에 독립의 저항을 이어가고, 절망 속에 한 그루 희망의 나무를 심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젖은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카슈미르의 아버지는 말한다. “힘들 때면 저 만년설산을 바라본다오. 우리의 내일을 위해 자신의 오늘을 바친 내 아들 딸들이 저 흰 산에 있지요.” 어린 나무를 어깨에 매고 산정을 오르는 사람은 말한다. “이 작은 나무가 어서 자라나 추워 떠는 이들에게 불이 되고 빵이 되고, 삶을 일으켜 세우는 푸른 의지가 되면 좋겠어요.” 우리들 고통과 슬픔은 끝이 없겠지만 우리들 사랑과 희망 또한 끝이 없는 것. 눈부시게 아름다운 카슈미르의 봄, 그리고 희망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박노해
이번 전시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 사진전이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다.”(무굴제국의 황제 제항기르) 만년설이 빛나는 히말라야 산맥 아래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는 카슈미르. 수천 년간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온 문명의 교차로이자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어우러진 평화의 땅이었지만, 1947년부터 시작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 분쟁으로 눈물의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도 인도군의 탄압 속에 독립의 저항을 이어가고, 절망 속에 한 그루 희망의 나무를 심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젖은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카슈미르의 아버지는 말한다. “힘들 때면 저 만년설산을 바라본다오. 우리의 내일을 위해 자신의 오늘을 바친 내 아들 딸들이 저 흰 산에 있지요.” 어린 나무를 어깨에 매고 산정을 오르는 사람은 말한다. “이 작은 나무가 어서 자라나 추워 떠는 이들에게 불이 되고 빵이 되고, 삶을 일으켜 세우는 푸른 의지가 되면 좋겠어요.” 우리들 고통과 슬픔은 끝이 없겠지만 우리들 사랑과 희망 또한 끝이 없는 것. 눈부시게 아름다운 카슈미르의 봄, 그리고 희망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박노해
80년대 군사독재 시대에는 민주 투사이자 저항 시인이었고,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가 되어 7년여를 감옥에 갇혀있었다.
민주화 이후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묵묵히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
지난 17년간 '지구시대 유랑자'로 전 세계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
지도에도 없는 마을을 두 발로 걸으며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진실을 담아왔다.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4년 현장 노동자로 활동하던 중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감시를 피해 사용한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은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당시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그의 시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하나의 불꽃이 되어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역사 속에 보여준 생생한 사례가 되었다. 1989년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군부독재 하에서 7년 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3년 옥중에서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 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회적 침묵을 하며, 지구 시대의 인간해방을 향한 새로운 사상과 실천에 착수한다. 2000년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www.nanum.com)를 설립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을 모아 2010년 첫 사진전 [라 광야]展과 [나 거기에 그들처럼]展(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국내외 현장에서 쓴 304편의 시를 엮어 12년 만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2012년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좋은 삶의 문화 공간 '라 카페 갤러리'에서 글로벌 평화나눔 사진전을 상설 개최하고 있다. 2014년 박노해 아시아 사진전 [다른 길]展(세종문화회관) 개최와 함께 사진집과 사진에세이 『다른 길』을 출간했다. 오늘도 국경 너머 인류의 고통과 슬픔을 끌어안고 새로운 사상과 대안 혁명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대에는 민주 투사이자 저항 시인이었고,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가 되어 7년여를 감옥에 갇혀있었다.
민주화 이후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묵묵히 스스로 잊혀지는 길을 택했다.
지난 17년간 '지구시대 유랑자'로 전 세계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
지도에도 없는 마을을 두 발로 걸으며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진실을 담아왔다.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4년 현장 노동자로 활동하던 중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감시를 피해 사용한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은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뜻으로,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당시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그의 시는 87년 '6월 민주항쟁'의 하나의 불꽃이 되어 '시의 힘'이 무엇인지를 역사 속에 보여준 생생한 사례가 되었다. 1989년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군부독재 하에서 7년 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3년 옥중에서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 보상금을 거부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회적 침묵을 하며, 지구 시대의 인간해방을 향한 새로운 사상과 실천에 착수한다. 2000년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www.nanum.com)를 설립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을 모아 2010년 첫 사진전 [라 광야]展과 [나 거기에 그들처럼]展(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국내외 현장에서 쓴 304편의 시를 엮어 12년 만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2012년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좋은 삶의 문화 공간 '라 카페 갤러리'에서 글로벌 평화나눔 사진전을 상설 개최하고 있다. 2014년 박노해 아시아 사진전 [다른 길]展(세종문화회관) 개최와 함께 사진집과 사진에세이 『다른 길』을 출간했다. 오늘도 국경 너머 인류의 고통과 슬픔을 끌어안고 새로운 사상과 대안 혁명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