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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1
2019.01.07 21:00

2018 온빛사진상 수상작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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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2018 온빛사진상 수상작 사진전
전시기간 2019. 1. 15 ~ 1. 27
전시장소 류가헌 Ryugaheon 전시1, 2관, Seoul
오프닝 2019년 1월 15일 (화) 오후 6시
갤러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13-3(자하문로 106) 02-720-2010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ryugaheon.com
참여작가 권학봉, 박창환, 신락선, 우해미, 최우영
관람시간 화~일 11:00am~06:00pm 월 휴관
자신의 이름이 큼지막이 적힌 종이를 들고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서있는 사람들.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선정하고 수여하는 사진상인 ‘온빛사진상’이 2018년 최우수상으로 선정한 최우영의 [나의 이름] 속 풍경이다. 이 사진에는 ‘이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80여개 달한 지원작들 가운데 온빛이 최종적으로 [나의 이름]을 선정함으로써,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자신의 국적과 한글이름을 잊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마음과 그의 향후 작업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 ⓒ권학봉
    1 군담캠프에서 바라본 쿠투팔롱캠프의 전경이 낮은 구릉지대에 끈임없이 펼쳐저 있다
  • ⓒ권학봉
    8 땔감과 찬거리를 가지고 귀가하는 가장, 요리를 하기위해서 필수적인 뗄감과 저녁 찬거리로 바나나 줄기를 구해왔다
  • ⓒ권학봉
    14 빨래 너는 사람, 사하라 카툰은 군경에 의해 집이 불타고 세 아들을 읽었다. 딸 다섯은 방글라데시로 같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 ⓒ권학봉
    22 앉아 있는 남자, 딜 모하마드는 다리가 불편해 손주, 아들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박창환
    01_Racoon and Human_2010
  • ⓒ박창환
    03_Formosan Deer_2009
  • ⓒ박창환
    04_Himalayan Wolf_2013
  • ⓒ박창환
    14_Asiatic Elephant_2017
  • ⓒ박창환
    17_Serval _ Cat_2014
  •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 ⓒ우해미
  • ⓒ우해미
  • ⓒ우해미
  • ⓒ우해미
  • ⓒ우해미
  • ⓒ최우영
    하양일
  • ⓒ최우영
    리민영
  • ⓒ최우영
    김유순
  • ⓒ최우영
    강명남_허령미_강효준_리령희_강기영_강채영_강춘안_강설양
  • ⓒ최우영
    석미월_리례나_우금향_곽성실_김미령

2018년 ‘최우수온빛상’ 최우영 [나의 이름], ‘뉴플랫폼상’ 우해미 [분홍 옷 입은 엄마]
온빛상수상자-최우영, 우해미, 권학봉, 박창환, 신락선 _ 1월 15일부터 류가헌에서


자신의 이름이 큼지막이 적힌 종이를 들고 혼자, 혹은 가족과 함께 서있는 사람들.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선정하고 수여하는 사진상인 ‘온빛사진상’이 2018년 최우수상으로 선정한 최우영의 [나의 이름] 속 풍경이다. 이 사진에는 ‘이름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80여개 달한 지원작들 가운데 온빛이 최종적으로 [나의 이름]을 선정함으로써,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자신의 국적과 한글이름을 잊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마음과 그의 향후 작업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사진가 최우영이 60만 재일교포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된 것은, 일본에 계신다고만 알고 있던 조부가 [조총련동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고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부터다. 자신의 집안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 받았다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일본법률상 무국적으로 간주되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교포들의 실상,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의 이야기 등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최우영은 그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올해로 벌써 광복 73주년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와 희생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고, 역사교과서의 문제 등이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그런 속에서도 과거 일본이 그토록 파괴하고 싶어 했던 한국의 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이름은 그 사람이 지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2018년 [온빛사진상]에는 총 79명이 지원했으며, ‘최우수상’을 받은 최우영을 포함해 5명의 수상자가 선정되었다. 이번에 신설된, 후지필름일렉트로닉이미징코리아에서 후원하는 ‘뉴플랫폼상’을 수상한 우해미의 [분홍 옷 입은 엄마]는 치매판정을 받은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통해 현대 사회의 치매노인문제를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권학봉의 [로힝야 난민캠프, 1년 후]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의 삶을 통해, 국제사회가 소수민족의 인권과 그들을 향한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마땅할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박창환의 [동물원]은 한국에 동물원이 개원한지 100주년이 된 해인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작업한 것이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임의로 정의내리지 않고, 그저 우리에게 그곳에서 살고 죽는 동물의 삶을 보여주었다. 신락선의 [프레임프레임588]은 정치적, 역사적으로 다양한 프레임 속에서 변모해온 매매춘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이다.

온빛다큐멘터리와 해마다 온빛사진전을 지원해오고 있는 류가헌은, 최우수 수상작만을 개인전 형식으로 열었던 기존의 전시를 최종 수상자 5명 전체로 확장하였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넘어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2018온빛사진상 수상작 사진전은 2019년 1월 15일부터 류가헌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온빛다큐멘터리'는 2011년 사진가들이 함께 한국다큐멘터리 사진의 활성화를 위해 뜻을 모아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을 다시 돌아보면서 사진을 통해 이 시대를 보다 깊이 있게 해석하기 위해 모인 사진가 단체이다. '온빛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대중과 올바른 소통을 이루어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함과 동시에 한국다큐멘터리사진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대의 진정한 기록이자 미래에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사료가 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류의 기쁨과 고통, 그리고 인간의 존귀함을 열정적 의지로 담아내고 있다.

우리들은 대중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의미 있는 스토리를 발굴, 사진으로 기록하여 사회적 소통과 공감을 이루고자 한다. 동시대인들의 삶에 대한 정보 공유,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하여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에 '온빛 다큐멘터리'가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온빛사진상]은 다큐멘터리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누구나 응모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다큐멘터리사진 뿐 아니라 순수 다큐멘터리, 생태-자연 다큐멘터리, 포토저널리즘 등 사실적인 기록 사진에 기반한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면 자유롭게 응모할 수 있는 상으로 온빛 다큐멘터리 회원 사진가들이 선정하는 사진상이다.

권학봉 [로힝야 난민캠프, 1년 후] _ 온빛수상자


소수민족은 나의 오래된 주제다
작년의 로힝야 사태는 소수민족 문제가 ‘국가권력’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힘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수민족’이라는 단어는 이념이나 사상, 경제적 이권, 정치적 지향점 등과 상관없이 사람의 숫자로만 정의된다. 이 단순한 숫자가 정치적 이권과 경제적 탐욕이 뒤섞인 국가권력에 휩쓸릴 때 어떻게 박해와 말살로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 동부지방부터 미얀마 라카인주에 걸쳐 오랜 기간 살아온 소수민족이다. 라카인주에서도 다수는 라카인족이니 그보다 수가 적다. 기본적으로 시아파 계열의 무슬림이며, 주로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방글라데시와의 국경 주변에 거주한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 대부분의 민족들과는 인종과 언어, 문화가 다르며,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한 다수의 다른 소수민족과도 다르다. 지난해 군부의 지원 혹은 묵인하에 라카인주에서 행해진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로힝야 말살정책의 여파로 약 2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70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로 유입되었다. 로힝야의 학살은 뿌리가 깊지만 작년의 대규모 학살은 준비부터 실행까지 매우 조직적이며 치밀했다.

나는 로힝야 난민이 집단 수용되어 있는 쿠투팔롱-발루칼리 세계최대 난민수용소부터 90㎞ 남쪽 테크나프까지 이어진 캠프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캠프에서의 촬영이나 인터뷰는 방글라데시 내 모든 로힝야 난민캠프를 총괄하는 RRRC(Refugee Relief and Repatriation Commission)의 허가 하에 촬영되었으며, 특별허가가 필요한 UNHCR의 임시캠프와 국경 없는 의사회(MSF)의 협조가 있었다. 촬영은 약 11일 동안 통역과 캠프 내 안내를 담당한 픽서와 함께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현지 난민을 포터로 채용했다. 촬영 방법은 캠프 방문 후 무작위로 촬영에 동의하는 난민가족을 인터뷰하면서, 보여주길 원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이번 난민촬영과 인터뷰는 캠프에 정착한 지 딱 1년이 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캠프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국내언론이나 인터넷 여론으로 형성되고 있는 로힝야 문제들 즉 진짜 불법이주민인지, 또 방글라데시로 대거 탈주 할 정도로 미얀마 내 살인, 방화, 협박, 탈취 등의 문제가 존재했는지를 알아보는 것 또한 중요했다. 언론보도는 큰 사건의 개요를 훑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뭔가 피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다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촬영기간 중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한 질문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고향 또는 태어난 장소가 어디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대부분 라카인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장소였으며, 구체적인 마을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미얀마, 아니 이전의 버마 탄생을 바간왕조의 후예라고 쳐도 영국 식민지 시절을 제외하면 미얀마가 라카인주를 정치적으로 완벽히 지배한 기간은 18세기 중 50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불법이주민 취급은 다분히 현 미얀마 정부의 치부라는 생각이다. 현시점에서 최소 3대 이상 자국의 영토에 정착해 거주해온 사람들을 민족 단위로 분리해 국적을 박탈하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주장은 UN 창립 이후 최악의 소수민족 정책임에 틀림없다. 또 미얀마 라카인주와 방글라데시 치타공주의 경계가 되는 나프강은 쉽게 넘을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로힝야의 미얀마 내 거주는 어찌 보면 더욱 오래된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다.

현재 로힝야 난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미얀마밖에 없다. 인터뷰한 모든 로힝야들이 미얀마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같은 국민으로서 대우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단한 배상이나 금전적 요구가 아니라,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재산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함부로 죽임을 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시민권을 달라는 것이 로힝야가 원하는 전부다. 인터뷰한 로힝야들은 자신의 고향이 미얀마이며, 방글라데시는 외국이라고 말했다. 시민권 즉 생명의 보장과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고단한 난민캠프를 떠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미얀마는 인종청소나 다름없는 소수민족 탄압을 중단하고, 미얀마 내 로힝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교육과 제도를 통한 국가 통합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런 미얀마식 로힝야 소수민족 해결방법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명분으로 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역사에 전무후무하다. 이런 폭력적인 해결방법을 국제사회가 묵과할 경우 다른 국가에서도 소수민족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도 어떤 사회에선가는 소수민족 취급을 받을 수 있고, 그게 아니라도 이런 방식은 우리 사회가 지켜온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지향점을 향한 노력을 아무 의미 없는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우리와는 종교도 인종도 지리적 위치도 상관없는 로힝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 집어치우고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몇몇의 시선만이라도 이들을 향할 수 있게 한다면 내 사진의 쓸모는 다한 것이라 믿는다.

박창환 [동물원] _ 온빛수상자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인 창경궁 동물원은 1907년 만들어졌습니다. 1909년 11월부터 일반인에 공개됐습니다. 창경궁은 1911년 창경원으로 개칭했습니다. 창경궁 복권 계획에 따라 1977년부터 과천에 서울대공원 건립계획을 수립해 1983년 창경원 동물원을 이전했습니다. 1984년 5월 1일부터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2009년은 한국에서 동물원이 개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캐치프라이즈는 ‘지나온 100년, 다가올 100년’입니다. 그리고 2009년은 제가 동물원 작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2009년 8월의 어느 날, 우연히 한 사진책에서 미국 사진작가인 게리 위노그랜드(1928~1984)가 뉴욕의 동물원을 찾으며 찍은 사진집 [The Animals]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동물원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당초 10번 정도로 찾을 동물원을 나도 모르게 100번으로 정해버렸습니다. 전국에 있는 모든 동물원을 찾기로 했습니다. 5년 동안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해 부산, 광주, 울산, 전주, 김해, 진주, 대구, 원주, 춘천, 고령 등 전국에 있는 모든 동물원을 다녀왔습니다.

5년을 거치는 동안, 동물원 연작을 내 평생의 작업으로 정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의미하는 ‘평생’(平生)은 평평할 평 자에, 날 생 자를 씁니다. 평생에는 한 생을 평평하게 정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2009년부터 올해까지 270번 넘게 다녀온 동물원은 장소는 늘 같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평생을 동물원에서 보냅니다. 동물원에서 평생 살아가는 동물들, 그런 동물들이 있는 동물원을 평생 사진으로 담고자 하는 내 모습은 어딘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면회하는 심정으로 동물원에 가고, 동물들을 만납니다. 만약 누군가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의 삶이 평온하다고 하면, 그것으로 동물원은 평화로운 곳이 되는 것일까요? 반대로 누군가 동물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면, 동물원은 불행한 곳이 되는 것일까요? 저마다의 정의를 내릴 순 있지만, 나에게 동물원은 그저 동물원 그 자체입니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작업한 제 동물원 연작은 한국에서 동물원이 만들어진 1세기가 지나고, 2세기를 맞이한 10년의 기록입니다. 더불어 10년 동안 동물원에서 살아간 동물원 동물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죽어가는 동물들의 삶을 를 통해 한국의 동물원을 재정의 하고자 합니다.

신락선 [프레임프레임588] _ 온빛수상자


우리시대의 성매매 문화에 대한 다층적 접근과 고민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서구 사회와 근대의 매춘에 대한 생각은 4세기 기독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지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젊었을 때의 방종한 생활과 그 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성욕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과 인간들을 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매춘이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제거되었다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설사 매춘이 여러 가지 악과 결부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허용하는 편이 매춘부를 사회로부터 추방하는데 따르는 위험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매춘은 보이지 않는 ‘이중규범’ 속에 제도화되었고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앵겔스는 경제조직이 변하면 매춘은 사라진다는 이론을 펴기도 했다.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지 14년이 지났다.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집창촌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음성적인 성매매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곁에 깊숙이 들어와 있고 이제는 정확한 실태파악 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음성화 되어 버렸다. 안마시술소, 마사지업소, 룸싸롱, 휴게텔, 노래방, 키쓰방, 포옹방, 인터넷 성매매 싸이트, 스마트폰 앱, 해외원정 성매매 등등.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에 이용한다는 오피스텔은 적발하기도 어렵고, 강남의 어느 초등학교 반경 2km 내에 20여 개의 성매매 또는 유사 성매매 업소가 적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성적인 성매매를 과연 법에 의한 단속과 처벌로 근절시킬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적인 발상을 ‘선진적’으로 실천한 나라는 많다.

이 작업의 타이틀이 ‘프레임프레임588’이 된 것도 성매매를 둘러 싼 역사적, 국가적, 정치적, 사회계층적인 프레이밍이 제 각각이었고, 나 또한 사진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프레임을 갖게 된 것에서 연유한다.

이제 그들은 거기 없다. 아니 쫓겨났다. 골목을 밝히던 홍등은 꺼지고, 꽃처럼 인형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던 그들의 자리에는 ‘철거, 매춘, 꺼져, 창녀’ 등등의 붉은 글씨가 저주의 주문처럼 휘갈겨 쓰여 있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음모를 감추려는 듯 높이 가림막이 쳐져있고, 중장비의 굉음소리와 함께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몸으로 꽃을 만들어 벌 나비를 부르던 그녀들, 모두 잠들어 있어도 그녀들의 지친 숨소리가 서성이던 그곳, 그녀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없대서 역사의 시야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어디선가 자본에 끄달려 헐떡거리며 세상을,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쩌면 이 구호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때 성노동자 비롯하여 모든 음지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이 분야에 대한 나의 사진 작업은 더욱 어렵겠지만 사회의 변화와 함께 진화하는 매매춘 현장을 기록하고 싶다.

우해미 [분홍 옷 입은 엄마] _ 온빛수상자 뉴플랫폼상


2017년 2월. ‘치매1등급’이라는 의학적 진단이 내려지고서 작아진 몸이 더 작아지셨다. 짙은 색 정장을 고집하셨던 엄마의 옷이 꽃무늬 화려한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음악교사로 성가대지휘자로 살아오신 시간이 30여년이다. 여전히 소리에 민감하셔서 TV와 전화소리, 모든 목소리에 대꾸하시느라 하루 종일 바쁘시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크게 반응하시고 대답하시는 엄마는 오늘도 성가를 들려드리니 예외 없이 따라 부르시고 지휘하신다. 무조건 반사처럼 엄마의 몸에 흐르는 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치매는 주관적 가치관 안에서 추구해왔던 삶의 되감기처럼 때로는 사회통념적인 ‘나’를 벗어버린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엄마와 나는 평행선 같은 관계였다. 가족 안에서 함께한 시간의 부족은 관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가져왔고, 엄마의 시간이 치매에 묶이고서야 엄마의 공간 안에 나의 낯선 시간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옷은 사람이 지닌 가치관이나 생각을 보여주는, 자의든 타의든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외면하고 ‘서운함’이라는 옷을 고집스럽게 입혀왔었나 보다. 엄마는 음악을 좋아하고 ‘감사합니다’ 인사를 잘하는 분홍색 옷을 입은 할머니다.

최우영 [나의 이름] _ 온빛수상자 최우수상


일본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포, 우리 민족.
2018년 올해는 광복 73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대한민국은 광복 73년이 된 지금까지도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물론 지나온 과거사에 대한 온전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했던 35년과 경술국치 이전부터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한 기간을 합해본다면 일본이 조선을 실제로 지배한 건 훨씬 더 오랜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오랜 식민지배에 대한 잔재는 지금까지 이어져 국내 여러 현안에 깊숙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있고서야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가늠해 볼 수 있기에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성찰은 한 국가의 뿌리와 토양을 정립하는 초석이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근현대사의 해석에 대한 첨예한 대립이 이어져 가고 있으며 늘 그래 왔듯 한반도는 긴장과 대립의 나날을 지속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어느 국가보다 가까운 일본과의 관계는 한반도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얽히고설킨 복잡 미묘한 관계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조선땅의 수많은 동포가 강제노역으로 일본본토에 끌려갔고 젊은 처자들은 군 위안부로 끌려가 전쟁터의 성 노예로 치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식민지배에서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픈 역사를 오늘날까지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2015년 9월,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사망 후 매장되었던 희생자 115위가 70년 만에 유골이 되어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에는 고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유해가 일본 전역에 매장되어 있고 언제쯤 그들이 모두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을는지 가늠할 수 없다. 또한, 지금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더불어 굴욕적인 지난 정부의 위안부합의를 반대하는 수요집회가 무려 26여 년간 열리고 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하에 일본에 대한 친일행위가 미화된 국정교과서가 출판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과거는 과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닌 현 시대의 토대를 이루는 강력한 근간임을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경험하며 또 깨닫고 있다.

교과서의 활자 속에만 갇혀 있을 것 같은 역사의 현실은 책 속의 활자로 그치지 않는다. 과거의 갈림길을 통해 형성된 오늘은 크건 작건 각자 개인의 삶 전반에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다. 본인의 친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뒤 즈음이었다. 월남전 파월장병 이셨던 아버지는 미군이 뿌린 고엽제 후유증으로 보훈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이다. 일본에 살아계시고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간부로 계셨다는 간단한 정보뿐. 일본에 살아계신 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재일교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었다. 심지어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총련, 재일교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총련은 막연히 북한과 관련된 일본 교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조총련동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고국을 방문하신 할아버지와의 짧은 만남, 그 몇 시간이 내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연좌제를 통해 스물이 넘어서야 왜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지, 할아버지를 기억조차 못 하시던 아버지는 왜 직장을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십 수 년이 지나고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조금씩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일본의 교포들에 대해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여러 조선학교와 교포들의 집도 방문하게 되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재일교포에 대해 가졌던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과 무관심을 버리고 그들을 온전히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던 지역에 가보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3년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으신 조선인 학교 교장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일본을 오가며 어느새 내 지금의 삶을 이루게 된 것은 지나온 과거 역사의 여러 갈림길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족과 민족, 역사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사진으로 재일교포를 기록하게 된 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끌려왔던, 그리고 제주 4.3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세대를 이어오면서 현재 일본 전역에 60만에 달하는 재일동포가 살고 있으며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 국적과 일본국적, 지금은 사라진 '조선'이라는 분류를 한 일본 법률상 무국적으로 간주하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동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서 일본에 남아있던 동포들은 남북으로 나뉘어 혼란스러운 정국에 휩싸인 본국으로부터 국가적 관심이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지키는 것만이 일본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는 길임을 깨닫고 자구적으로 민족의 역사교육을 가장 중요한 교육사관으로 온 힘을 다해왔다. 일본 정부의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 민족혼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들 또한 지나온 근현대사,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시간의 터널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반(半)일본인으로 대접받고,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색안경 낀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재일교포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는 자신의 한글 이름, [나의 이름]작업을 통하여 재일교포들이 여전히 일본에서 우리와 같은 동포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전히 누구보다 통일된 하나의 조국을 꿈꾸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하나 된 조국을 꿈꾸고 싶다. 남북정상이 만났다. 어느 때보다 통일의 희망이 가까워진 이 시점, 우리는 만나야 한다. 떨어져 있던 손을 다시 잡을 때이다. 한국과 북한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그들이 어쩌면 통일의 다리를 이을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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