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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8
2018.08.01 21:13

김용철 사진전

조회 수 220 추천 수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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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경의선 - 추억 속으로 간 기차
전시기간 2018. 8. 2 ~ 8. 8
전시장소 반도갤러리, Seoul
오프닝 2018. 8. 2 오후6시
작가와의 만남 2018. 8. 4 오후2시
갤러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 4길 16 반도빌딩 2층 (02-2263-0405)
전시기획 눈빛출판사, 그린아트
후원 반도갤러리
서울역에서 출발해 문산까지 52.5km를 달리는 기차다. 이름대로라면 신의주까지 499km를 달려야 하지만 아쉽게도 종착역은 문산이다. 세월이 흘러 경의선이 달리던 일산, 파주에는 신도시가 생겼고 정차역이 늘어났다. 기차도, 역사도, 주변 환경도 현대화 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 가슴엔 옛 경의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연애시절, 아내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고, 경의선 신촌역 부근에서 일했다. 우리는 종종 신촌역에서 만나곤 했다. 내가 먼저 도착할 때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하고 어스름한 대합실에서는 색 바랜 노선표와 요금표, 화전, 강매, 능곡, 백마, 금촌, 파주, 문산 같은 낯선 지명을 훑어보았다. 보따리를 이고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 백마역으로 데이트 가는 연인들, 휴가 나온 군인,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합실을 차지하고, 역무원은 승차권 귀퉁이에 펀치로 구멍을 내고 있다. TV나 영화에서나 볼 풍경이었다. 신촌역 대합실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칠이 벗겨진 대합실 창틀 넘어 기차와 선로는 정겨웠고 기차는 허름했다. 두텁게 덧칠해진 페인트는 그마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녹이 슬었고, 쾌쾌 묵은 냄새마저 풍겼지만 나는 왠지 싫지 않았다. 경의선에 오르기만 하면 느리게 달리는 기차에서 덜커덩 덜커덩 기차 특유의 소리를 들으며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객차 연결 통로에서 담배를 피고, 난간에 매달려 바람을 맞고, ‘스포츠 서울’의 만화 ‘발바리의 추억’을 보고, 캔 맥주를 마시며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눴다. 이 객차 저 객차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 우는 아기를 달래는 젊은 엄마, 5일장에서 손주에게 줄 선물을 손에 쥔 할머니, 통기타를 든 군인, 바짝 달라붙은 연인들이 내 주변 자리를 차지했다. 가끔은 덩치 큰 미군들도 볼 수 있었다. 아마 7~8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백마역의 화사랑, 숲속의 섬 등을 기억할 것이다. 달달한 연애의 장소이자 손꼽아 기다렸던 휴가를 즐기는 장소였다. 때로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이곳에 모였다. 경의선은 호박, 고추, 깻잎을 담은 보따리를 장터로 나르는 아낙네의 발이자 서울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발이었다. 나는 백마역에서 연애를 하고, 경의선 옆 행신동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경의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경의선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나는 지금도 경의선을 타고 여행을 한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까지 가고 싶다. 북한 사람들의 달달한 사랑과 사람 사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 2017. 08. 26.
  • ⓒ김용철 Yongchu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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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철 Yongchul Kim

경의선


서울역에서 출발해 문산까지 52.5km를 달리는 기차다.
이름대로라면 신의주까지 499km를 달려야 하지만 아쉽게도 종착역은 문산이다.
세월이 흘러 경의선이 달리던 일산, 파주에는 신도시가 생겼고 정차역이 늘어났다.
기차도, 역사도, 주변 환경도 현대화 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 가슴엔 옛 경의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연애시절, 아내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고, 경의선 신촌역 부근에서 일했다.
우리는 종종 신촌역에서 만나곤 했다.
내가 먼저 도착할 때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하고 어스름한 대합실에서는 색 바랜 노선표와 요금표, 화전, 강매, 능곡, 백마, 금촌, 파주, 문산 같은 낯선 지명을 훑어보았다.
보따리를 이고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 백마역으로 데이트 가는 연인들, 휴가 나온 군인,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합실을 차지하고, 역무원은 승차권 귀퉁이에 펀치로 구멍을 내고 있다. TV나 영화에서나 볼 풍경이었다.
신촌역 대합실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칠이 벗겨진 대합실 창틀 넘어 기차와 선로는 정겨웠고 기차는 허름했다.
두텁게 덧칠해진 페인트는 그마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녹이 슬었고, 쾌쾌 묵은 냄새마저 풍겼지만 나는 왠지 싫지 않았다.
경의선에 오르기만 하면 느리게 달리는 기차에서 덜커덩 덜커덩 기차 특유의 소리를 들으며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객차 연결 통로에서 담배를 피고, 난간에 매달려 바람을 맞고, ‘스포츠 서울’의 만화 ‘발바리의 추억’을 보고, 캔 맥주를 마시며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눴다. 이 객차 저 객차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 우는 아기를 달래는 젊은 엄마, 5일장에서 손주에게 줄 선물을 손에 쥔 할머니, 통기타를 든 군인, 바짝 달라붙은 연인들이 내 주변 자리를 차지했다. 가끔은 덩치 큰 미군들도 볼 수 있었다.
아마 7~8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백마역의 화사랑, 숲속의 섬 등을 기억할 것이다. 달달한 연애의 장소이자 손꼽아 기다렸던 휴가를 즐기는 장소였다. 때로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이곳에 모였다. 경의선은 호박, 고추, 깻잎을 담은 보따리를 장터로 나르는 아낙네의 발이자 서울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발이었다.
나는 백마역에서 연애를 하고, 경의선 옆 행신동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경의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경의선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나는 지금도 경의선을 타고 여행을 한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까지 가고 싶다.
북한 사람들의 달달한 사랑과 사람 사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

2017. 08. 26.

경의선, 우리 모두의 청춘


박준(작가, 여행가) 여자와 남자

스물한 살 동갑내기가 만났다. 남자는 경기도 성남, 여자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다. 두 사람은 종종 신촌 기차역에서 만나 경의선을 타고 백마역으로 향했다. 남자는 낡고 투박한 경의선 기차가 좋았다. 기차 특유의 기름 냄새, 찌든 냄새마저 싫지 않았다. 그 보잘 것 없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기차에서 담배 피던 시절이다.
남자 홀로 기차에 오를 때도 있었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녀를 만난다고 상상하니 설레기만 하다. 성남에서 신촌으로 와 다시 행신까지 가는 길이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에게 경의선에 오르는 일은 그저 기차를 타는 게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그녀를 보러 가는 길이고, 그녀와 함께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남자 손에는 늘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카메라가 스물네 시간 그와 함께 했다. 여자 친구를 보러 가는 길에, 또는 여자 친구와 함께 탄 기차에서, 그리고 무작정 내린 간이역에서 만난 사람들, 주변 풍광을 찍고 또 찍었다. 졸업 후 여자는 신촌 부근에 직장을 구했다. 신촌 기차역은 여전히 두 사람의 ‘만남의 장소’였다. 이 즈음에도 남자는 경의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경의선(가제??)>은 1988년에서 95년까지 ‘청년’ 사진가 김용철의 기록이다.

마이마이와 화사랑

경의선은 1905년 2월5일 용산-신의주 구간의 운행을 시작했다. 1906년 청천강 대동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경성에서 평안북도 신의주까지 전구간이 개통됐다. 경성을 출발한 기차는 문산을 거쳐 개성, 사리원, 대동강, 평양, 신의주를 거쳐 안동역까지 달렸다. 1902년 5월8일 기공식을 치르고 3년도 안 돼 천리 철길을 냈으니 경의선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가 배어 있을까.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경의선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북한에서는 평양을 기점으로 평부선, 평의선으로 불렸다. 파주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신의주까지 456km를 더 달려야 제 이름값을 하는데 기차는 멈춘 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1980년대 후반 경의선 비둘기호는 대여섯칸이 고작이었다. 20년도 더 된 기차다. 심한 소음을 내는데다 창문은 녹슬고 페인트칠은 벗겨졌다. 일부 객차는 출입구 문이 아예 없거나 닫히지 않았다. 화장실은 더럽고 자리에선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김용철은 즐거웠다. 데이트 가는 젊은 연인,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환타와 함께 삶은 달걀을 까먹는 할머니, 오일장에 푸성귀 팔러가는 할머니, 기타 들고 휴가 가는 군인,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마이마이를 듣는 여학생이 한결같이 예뻐 보여 찰칵 찰칵 쉬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는 데 천장에서 선풍기가 돌아가고, 골드식용유 기름통을 든 청소부가 지나가 좋았고, 빨대로 맥콜을 마시는 연인이 있어, 카메라가 있어 좋았다.
김용철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춘들이 경의선에 올랐다. 주말에는 천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들 정도였다. 160원을 내고 신촌역에서 경의선을 탄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3~40분후 허름한 시골역인 능곡이나 백마에서 내렸다. 그 시절 경의선의 주인공은 백마역, 그 중에서도 ‘화사랑’이란 주점이었다. 주인공이라곤 해도 사실 백마역에는 화사랑이나 ‘기차길옆 오막살이’ 또는 ‘썩은 사과’ 같은 학사주점 몇 개와 논밭뿐이었다. 괜스레 역 주변 철로 위를 서성이다 주점에 들어가 동동주나 막걸리에 파전이나 도토리묵을 먹었다. 맥주는 사치였고 인터넷 같은 건 없던 시절이다. 주점 테이블에 놓인 성냥을 사각으로 층층이 쌓으며 소일하고, 촛불을 밝힌 채 타는 목마름 운운하는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가는 철로 위에 동전을 올려놓거나 논두렁을 바라보며 철로를 따라 또 다른 기차역이 나올 때까지 느릿느릿 무작정 걷기도 했다. 백마역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의선 기차역은 대개 손바닥만 한 시골 역이었다. 승무원조차 없는 간이역도 있었다. 강매역에선 마을 주민 중에 역 근처에 살고 나이가 좀 들어 한갓진 이가 역무원 노릇을 했다. 그마저 아무도 없을 때는 덩그러니 걸린 집표함만이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을 맞았다. 동네 사람이 역무원 노릇 하던 시절, 겨우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기차역 대합실은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 만나는 반상회 같은 자리였다.

연극의 초연 같은 봄날

경의선 타고 오가던 그 때 지갑은 얇아도 인식은 풍요로웠다. 김용철은 사진에 대해 깊이 빠져있었고, 모든 게 궁금했다. 모든 걸 사진에 담으려고 애쓰던 시절이다. 돈이 없어 깡소주만 마셔도 즐거웠다. 기차에 매달려 바람을 맞을 때마다 엄청난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가을날이면 철로 옆에 핀 분홍색 코스모스를 꺾어 연인에게 건넸다.
고작 당일치기 여행에 불과했지만 서울 근교 어딘가를 단 둘이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김용철이 그랬듯 모든 연인들은 한껏 설렜을 것이다. 경의선을 함께 타면 연애의 한 장이 가벼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 겨울이면 기차역 주변 찻집이나 주점의 장작더미에서 불꽃이 타오르듯 부드러운 불빛은 연인들의 몸과 마음을 사르르 녹여버렸다. 우리, 내년 겨울에 또 오자고, 기약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그 시절이 생애 최고의 시간이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80년대 중후반이 어땠던가? 군부독재 시절이다. 매일 최루탄을 맞으며 학교를 다녔던 암흑의 시절이다. 그럼에도 뜨겁고, 정의롭고, 순수한 시절이기에 김용철 같은 많은 이들이 그 때를 아름다운 나날로 기억한다.

<경의선>에는 경의선 철로를 따라 펼쳐진 여러 풍경도 담겼다. 가좌역과 수색역 사이 실개천도 등장한다. 그 때 실개천에는 민물새우가 살았고, 동네 아이들은 새우를 잡겠다고 물장구를 쳤다. <경의선>을 펼치면 지금은 거대한 신도시가 되어버린 운정역,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지은 강매역의 옛 모습도 볼 수 있다. 지금 일산이나 운정 신도시 사람들은 백마와 운정의 이런 옛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적 있을까? 이제는 막을 내린 연극의 초연 같은, 어느 새 흘러가버린 짧은 봄날의 세계다.
세월이 지나 나이는 잔뜩 들었다. 그런데 사는 게 즐겁다고, 사는 게 가슴 벅차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다.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백마역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머리는 희끗희끗 해도 백마역에만 가면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것 같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 시절이 그리워 한번은 현대화되고 복선화된 백마역을 찾아갔었다. 논두렁 대신 아파트 숲이 백마역을 둘러쌌다. 눈앞에 백마역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나는 이곳에 온 적 있는데, 순간이라도 백마역에 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마역. 이름은 같지만 내 마음의 백마역은 거기에 없다. 80년대 청춘의 해방구 같던 백마역 주변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사라져가는 간이역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봤지만 사라져가는 버스 정거장을 찾아다닌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간이역을 다녀본 사람은 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찾아간 간이역은 대개 실망스럽다. 그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간이역을 찾아간다. 버스에선 느끼기 힘든 추억 때문이나 엄청나게 거대한 덩치가 주는 초월적이고 강력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잘났건 못났건 누구에게나 청춘의 한 시절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경의선 기차는 수십 년 동안 경적을 울리며 수많은 이들을 실어 날랐다. 어디 연인들뿐이랴. 칸칸이 숱한 사연이 배어있다. 힘겨운 시절을 살아온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과 닮았다. 어쩌면 부모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볼품없는 비둘기호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각하건 못하건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지난 시간은 그저 그립다. 김용철이 포착한 <경의선>에서 우리는 짧디 짧은 인생, 아름다웠던 그 날을 본다.

기억하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어디라도 갈라치면 당연하다는 듯 고속열차에 오른다. 새마을호 기차마저 시시하게 여긴다. 신촌 기차역에서 제 아무리 기다려도 비둘기역 경의선 기차는 오지 않는다. 이제와 생각하면 ‘경의선 데이트’는 은밀하기커녕 얼마나 시시한가? 교외로 떠나지만 자가용 타고 휑하고 달리는 대신 새마을호, 통일호도 아닌 비둘기호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내리면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논밭이 펼쳐졌다. 한적한 철로 주변을 무작정 걷고, 비싼 경양식집 대신 허름한 민속주점에서 술이나 차를 마셨다. 그게 전부다. 서울에서 멀지 않으니 하루를 머물 핑계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아름다웠다. 더 바랄 게 없는 청춘의 하루였다. 그렇게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세월이 참 무던히도 흘렀다. 그 사이 언젠가 옛경의선은 사라졌다. 옛경의선처럼 청춘도 갔다. 세월을 속절없이 보내고 나서야 백마역 주변 선로를 따라 걷던 그 길이 얼마나 곱고 화사했는지 알았다.
2018년 경의선은 여전히 백마역을 오가지만 화사랑을 찾던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백마역에 오지 않는다. 경의선도 백마역도 우리가 아는 그 모습이 아니다. 젊은 날의 경의선 백마역은 아스라이 사라졌다. 하지만 오래전 그 시절 백마역을 걷던 추억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모든 게 사라져 버린다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가? 우리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길을 걷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풍경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는 한 그 시절은 불멸한다.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견디며 어느 날 문득 펼친 <경의선>에서 위로 받는 이유다. 김용철은 말한다.

“지금도 사진 속 선로를 보면 연애할 때가 생각나요.”

3?년을 사진가로 살았던 그다. 사진가로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인생은 녹록치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소파에 누워 꼼짝 않는 모습을 볼 때 사진은 사치에 불과했다. 먹고 살아야 했다. 아내가 아플 때는 사진가로 살아온 걸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메라를 놓진 않았다. 찍고, 버티며 지나온 시간이다. 스물한 살에 만난 두 사람은 7년 후인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이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 몇??년이 됐다.
<경의선>을 보며 청춘의 연애시절을 떠올릴 이가 김용철뿐일까? 그 시절 백마역의 화사랑이 하나의 주점을 말하는 게 아니듯 <경의선>은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우리 모두의 청춘이다. 매캐한 기름내 풍기는 구닥다리 경의선 기차도, 논밭에 둘러싸인 허름한 백마역도 사라졌다. 이제 경의선을 어디서 추억하나? <경의선>을 넘기며 그리운 그 시절의 나를 만난다. 사라질 수 없는 마음의 풍경만은 그 자리 그대로 있다. <경의선>이 반갑고 귀한 이유다.

언제나 기차 타고 파리에 갈까

하지만 경의선은 김용철의 추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 때 한반도를 가로 질렀던 기차 아니었던가. 김용철은 꿈꾼다. <경의선>에 담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경의선을 언젠가 개성에서 신의주에서 카메라에 담을 날을. 그 때 그는 추억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를 담을 것이다. 경의선이 운행을 시작했을 때 승객 절반은 일본인, 화물 대부분도 일본인들 것이었다. 철저하게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경의선은 이제 단순히 남한과 북한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1만 킬로미터가 넘는 유라시아 철길의 시작점으로 기대를 모은다. 북한을 지날 수 없어 우리는 섬나라 국민으로 살았고, 바다 너머 가는 걸 '해외(海外)'여행이라 불렀다. 언제나 장거리 기차 타고 해외여행 갈 날이 올까? 경의선은 군사분계선에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미 연결돼 있다. 나는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수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아직 북한에 가보지 못했다. 나 또한 꿈꾼다. 서울을 출발해 평양과 북경을 가로질러 자작나무 늘어선 시베리아 벌판, 모스크바를 지나 유럽까지 달리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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