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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소개

아시아 현대 사진 : 왕칭송 · 정연두

대구미술관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지만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전통과 혁신의 조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아시아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에 주목하여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왕칭송(중국), 정연두(한국)의 작품을 통해 아시아의 사진을 조명하고자 한다. 주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해 작업하는 왕칭송과 정연두는 단순히 주어진 풍경이나 인물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감독이 되어 많은 사람들과 협력해 장면이나 풍경을 연출해 촬영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사회현상이나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스케일 있는 작업을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의 유사점과는 다르게 이들의 작품은 각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과 꿈에 주목하여 이들의 꿈을 작품 안에서 현실화 시키는 등 상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왕칭송(WANG Qingsong, 1966~)은 중국의 사회개방 이후 자본주의와 서구문화 유입으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 사회를 냉철한 시선으로 고발하며 화려한 문화 속에 가려진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나 현실에 감춰진 진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왕칭송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서 작가 자신의 모습을 디지털로 합성해 작업한 초기 사진부터 2000년 이후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중국의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소비사회의 근원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표현한 작품 등 총 16점이 전시되어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왕칭송이 작품을 통해 발언하는 중국은 경제, 사회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고통 받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 군상의 집합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모순적 삶의 태도나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논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해 마치 연극무대처럼 과장된 상황과 극적 요소들로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고 이를 촬영한다. 왕칭송의 차별화된 작품제작 방법과 작품에 담겨있는 특유의 풍자적 비판과 유머는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사진이라는 다분히 객관적인 성격의 매체를 사용해 눈에 보이지만 망각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그의 작품은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고 아시아의 대표적인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연두(JUNG Yeondoo 1969~)는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과 꿈에 주목하여 이들의 꿈을 현실화 시키는 작품으로 주목 받았다. 그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 허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이나 공연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동시대의 한국 작가 중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서른 두 가구의 가족사진을 담은 『상록타워』(2001), 아이들의 그림을 사진으로 재현한 『원더랜드』(2005),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보여준 『로케이션』(2007)과 소박하게 사교댄스를 즐기는 중년 남녀의 모습을 담은 『보라매 댄스홀』(2001) 등 총 9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정연두는 꿈과 현실을 병렬적 구조로 보여주거나 판타지를 이루어가는 현실적인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상이한 두 세계의 연결지점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작품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꿈을 현실화하되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지각아래 현실화한다는 것인데 꿈을 가시적으로 실현시키며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는 유쾌함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평범한 일상도 누군가에게 주목 받을 수 있고 누구나 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긍정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당면한 시대와 현실을 풍자적 비판 혹은 따뜻한 위로로 대중과 호흡하는 왕칭송, 정연두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아시아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아시아 현대 사진을 넘어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 및 작품세계 소개

1) 왕칭송 (Wang Qingsong (王庆松 1966~ )
1966년 중국 헤이룽장성 다칭 黑龍江省 大慶 출신
1991년-93년 스촨미술학원 유화전공
1993년 이후로 베이징 거주, 작업

왕칭송은 1990년대부터 중국 사회발전 중 나타나는 문제를 관찰하고 연극적 장면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오고 있다. 작가는 90년대 이래로 중국 격변기와 소비주의의 만연을 경험해왔다. 1992년 이후 중국과 중국인의 일상에 글로벌화와 시장경제가 깊숙이 스며들었는데 그 속도와 변화는 놀라움과 더불어 당황스러움과 질식의 느낌을 수반했다. 사람들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은 지극히 풍요로워졌으나 정치상황은 별다른 발전이 없어 글로벌 경제의 혜택 이면에 빈부격차 심화 및 인권과 존엄성의 결여, 무질서한 사회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 더불어 싸구려 만족감이 넘치고 사회주의 독재정치와 자본주의의 소비인플레 및 위기가 동시에 존재했다.

왕칭송의 작품에는 날 선 풍자와 따뜻한 관심, 현실과 가상 사이의 복잡한 모순이 담겨 있는데 특히 무형의 형태로 시대적 상황을 독특하고 선명하게 표현한다. 이로써 작품의 동시대성이 구성된다. 즉 그는 자신이 처한 시대에 뿌리를 두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이는 분리와 시대착오를 통해 형성되는 독특한 관계이다.

작가가 대표하는 리얼리즘 사진(연극적, 무대적인 현실을 포함해)이 중국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에서 현실은 진부한 배경이지만 사회와 개인의 삶의 기반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중국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사유는 사회화에 참여하는 공적 행위인 동시에 공적 기록을 벗어난 개인적 관찰이다.

사진과 조형의 관계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그의 작품은 순간적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거나 특정 집단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배경과 상황 연출의 재창조를 통해 현실 요소와 연출을 통합한다. 그는 개인의 해석을 현실에 뒤섞음으로써 현실을 예술적 현실이자 관념이 개입한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Night Revels of Lao Li (老栗夜宴圖)’에 등장하는 유명평론가인 리센팅(栗憲庭)의 사생활과 한희재(韓熙載)의 상황적 유사성, 리센팅의 실제상황과 작품 속 상황의 일치 여부 등은 실제와 가상 사이에 벌어지는 식별게임이다.

작가는 현실에서 포착한 문제의식을 연출 장면 속에 대입시킨다. 이 때 작가는 현실적 문제를 다룰 때 현실을 얼마나 드러내야 하는지, 현실적 모순과 갈등에 대해 어떠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지 등의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작품 ‘Follow You(跟你學)’에서 보이는 중국 교육제도의 문제는 여전히 복잡하다. 과장과 조정을 통해 재구성된 강의실은 원래 어떠한 모습인가, 현실이 여전히 가치 판단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는가 등과 유사한 물음은 그의 여러 작품에 모두 존재한다. 작가는 촬영기법 등에 의존하지 않고 구체적 연출이나 연극적인 현실 무대의 재창조 방식을 활용해 왔다. 그의 작품은 상황의 재창조에서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나 연출 장면이 사진으로 전환되면 사진의 원래 특징인 ‘증거로서의 진실성’은 모호해지고 또 다른 특수성이 드러나게 된다. 연출된 장면이 촬영 기록을 통해 실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Dream of Migrants(盲流夢)’와 ‘Posing Threats on the Battlefield(大擺戰場)’는 중국 사회의 일상적 단면이다. 그러나 화면은 구체적이거나 명확하지 않으며 역사의 기억, 현실의 관찰, 개인의 상상이 뒤섞여 있다. 현실에 널린 실제 모습이 직시된 적 없는 장면에 의해 실제와 유사한 사실에 싸여 우리 앞에 나타난다. 감상자는 작품을 보면서 개인이 겪는 현실이 단면적이고 파편적이며 자체적으로 풍경화된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풍자와 편견이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현실공간을 창조한다. 더불어 비판, 풍자, 동정, 따뜻한 관심 등 다양한 시선을 통해 가상의 무대현실 밖에 존재하는 더욱 커다란 현실과 개인이 처한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는 기존의 기록사진과 현재의 개념사진 사이에 틈을 내며 실제와 개념을 탐구하고 믿음과 의문을 동시에 구성한다. 본질적으로 그의 작품은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열린 사유가 가능한 공간이다. 현실은 개념화되지도, 텍스트로 완전히 귀납되지도 않는 입체적이고 풍부하며 어떠한 주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극도의 딜레마이다. 그의 작품은 일종의 은유인 동시에 딜레마를 표현한다. 현실적 딜레마에서 출발한 변화는 환상일 뿐이다. 정의와 필연을 구실로 한 중국사회의 변화는 물질생활을 바꾸어놓았지만 환상과도 같은 변화로 인해 인간 존재와 존재로서의 노력은 영원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딜레마에 대한 시각적 인지 방식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선 작품을 큰 사이즈로 구성하여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에게 작품이 돌진해오는 듯한 시각적 충격을 받게 한다. 수많은 인물과 사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풍부하고 복잡한 정보가 작품 곳곳에 포진해 있다; 다음으로 내용에 흡입되는 순간 순수한 의미에서 감상 행위가 시작되고 이후 시각 행위에서 더 나아가 지각행위, 판단행위로 전환되어 간다. 화면 속 인물의 표정, 동작, 환경, 문자, 사물, 사물의 재질 및 상표 등이 시각 중 텍스트에 섞여 더욱 세밀한 관계를 만들어내고 관객은 수많은 인물의 다양한 반응과 상이한 상황을 관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복잡한 정보와 시각관계가 새로이 통합되면서 처음 가졌던 시각적 인상은 완전히 와해되고 세부과정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통해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를 보게 된다. 수많은 인물과 사물 속에서 개별 사물을 독립적으로 읽어내기 어려워지며 개인의 폭력이나 황당함이 아닌 관계 속의 폭력과 황당함, 사람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 상호 견제의 갈등을 깨닫게 된다.

그의 작품은 사생활의 은밀함에서 사회정치변혁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상황과 거시적 주제를 모두 아우른다. 그는 풍부한 이미지와 다양한 기법을 통해 동서양의 역사적 걸작, 소비주의 문화 속 상징적 이미지, 사회정치적 뉴스 및 사건 등을 다루면서 오늘날 성공한 개도국이 경험하는 역사와 더불어 초강대국과 세계의 상호과정 중 개인과 세계가 맞닥뜨리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의 사진이 개별적 의문점을 시사하는 반면 시리즈 작품은 ‘갈등과 충돌’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면서 허무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작품을 통해 시대에 대한 거시적 판단은 예술과 이론 둘 중 하나를 통해 이루어짐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가 작품 속 인물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시대적 모순과 황당함은 결국 개인이 감당하게 될 뿐이며 이 같은 모순이 시대와 개인에 미치는 영향이 견고하고 쓰라리면서 크다는 사실이다. 글| 취찬찬(독립큐레이터, 평론가)

2) 정연두 (Yeondoo Jung, 鄭然斗 1969~ )
1969 진주 생,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
1997 런던대학,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석사 졸, 런던, 영국
1995 센트랄 세인트마틴 컬리지, 조소과 수료, 런던, 영국

"보라매 댄스홀"(2001)과 "상록타워"(2001)로부터 "원더랜드"(2004)를 거쳐 "로케이션"(2004~2010) 등에 이르기까지, 정연두의 작업은 일관되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이란 사건의 목격자나 참여자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관찰 대상의 객관성을 담보하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시점을 견지하는 이중의 효과를 지닌다. 카메라 매개를 통해 1인칭 관찰자로 위치하는 정연두 역시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의 관찰자일 뿐만 아니라, 일정부분 화면을 각색하는 연출자이기도 하다. 가령 "상록타워"에서 정연두는 ‘상록타워’라는 서울 도심의 한 임대아파트를 모티프로 삼아, 지번(地番)과 평수(坪數)는 동일하되 호수(戶數)가 다른 개별 가구들을 직접 탐방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특유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도출해낸다. 각기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주변의 오브제, 그리고 그를 둘러싼 배경의 세부들은 그 다양한 양상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닮아 있다. 이 같은 특징은 32가구의 가족 초상사진들을 각각 따로 분리시켜 들여다보는 것보다 한데 묶어 조망할 경우에 더욱 확연해진다. 그 결과, 이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도심 중산층의 동일화된 사회구조, 요컨대 ‘가족(family)’이라는 프로토타입의 토톨로지(tautology)와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상록타워"는 일반적으로 사진가에게 의뢰해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가족사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상록타워"에서 정연두는 낯선 가족의 사(私)적인 공간으로 침투하여 그 구성원들과의 다소 어색한 또는 불편한 동거를 감내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는 그들의 경직된 시선과 포즈를 통해 그들 앞에 자리한 카메라, 즉 정연두와의 모종의 교류를 감지하게 된다. 게다가 이때 충분히 여유롭지 못한 거실의 직사각형 동선으로 인해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근접 촬영하기 어려운 현실적 제약이 결국엔 시선의 제한된 구도와도 맞물리게 되는데, 정연두가 이를 벗어나지 않고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굳이 자유롭지 못한 동선에서 거실 전체를 담아내려 애쓰는 이 구도가 결과적으로는 정연두가 그들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정연두를 탐색하는 심리적 거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No Matter Where You Are
따라서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정연두의 시점, 즉 관찰자의 ‘위치(location)’가 어느 지점인가에 관한 물음이다. 이 의문은 정연두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가운데, 특히 "로케이션" 연작을 통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소격(疏隔)이 아닌 상호교감의 추동(推動)으로서 "상록타워"에서 야기되는 심리적 거리는 사실상 정연두와 상록타워 가족들 각 위치의 내부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카메라(정연두) 내부에 그들(상록타워 주민)이 존재하고 그들 내부에 카메라가 존재함으로써, 결국 양쪽 모두 프레임 내부에서의 관찰자로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각자의 시점은 ‘내부 관찰(inner observation)’에 준하는 맹점(blind spot)을 지니게 되며, 그로 인해 카메라 내부에서 정연두는 모든 것을 보지만 결코 전체(자신 포함)를 볼 수는 없다. 즉 상대적 객관만이 유효할 뿐이다. 절묘하게도 가족 뒤편, 그러니까 카메라 맞은 편 베란다 창문에 투사된 카메라 이미지가 이러한 내부 관찰의 역학관계를 방증해주는데, "상록타워"의 좌측 최상단부 사진을 #1으로 상정하고 우측 방향으로 일련의 넘버링을 매겼을 때 #5, #14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추컨대 이 이미지는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촬영 당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우연 내지는 실수로 짐작된다. 때로는 이런 해프닝이 예상치 못한 진실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예술은 분명 살아있다.

물론 내부 관찰자 시점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내부는 반드시 프레임 외부를 동반해야 성립 가능한 것으로, 내부와 외부가 서로를 매개하는 바로 그 접점(boundary)에서 이른바 관찰의 시계(視界)가 열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시 외부와 내부로 분화(分化)되고 또 다시 그 내부에서 외부와 내부로의 연속 분화, 즉 로케이션 전환이 촉발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일련의 실재와 비(非)실재의 교차(交叉) 과정들을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을 시각적으로 명시해주는 작품 중 하나가 "로케이션 #25"이다. 여기서는 투명한 창(window)을 유비하는 듯한 그리드(grid) 구도가 우리를 마치 실재로 안내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이 실재는 오로지 내부 관찰을 통해서만 유효한 세계를 투시할 뿐이다. 본래 사진은 비(非)매개를 가장한 매개에 대한 욕망의 표상이다. 그렇기에 사진이 실재와 비매개적으로 접촉한다고 믿는다면, 사진은 분명 실재의 투사체가 맞다. 이는 사진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을 바라보는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연유로 사진은 지나간 실재를 발산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실재와 비실재의 엄밀한 구분, 분리는 불가능해진다. 그보다 실재와 비실재는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실재는 비실재를 환경으로, 비실재는 실재를 환경으로 삼아 서로를 조건지을 뿐이다. 정연두의 관찰을 좀 더 관찰해보자.

"원더랜드"에서 정연두는 자신들의 꿈이나 상상, 느낌,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소망 등을 그린 어린 아이들의 그림과 부연 설명(작품 타이틀)을 실제 인물이나 사물들을 통해 구현한 다음,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옮겨온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이미지가 재구성, 각색되고, 현실이 가상으로, 가상이 현실로 전환되거나 조합 및 증폭되어 결과적으로 "원더랜드"는 제2, 제3의 판타스마(phantasma)를 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아이가 그린 원더랜드의 꿈은 정연두의 작품을 통해 일정부분 모방되고 있을 뿐, 정작 그 꿈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정연두는 과연 무엇을 한 것인가. 아이의 꿈을 실현한 것일까, 아니면 그 꿈이 실현 불가능함을 알려준 것일까. 정연두가 실현하고자 했던 아이의 꿈은 아이의 그림이었을까, 아이의 상상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이의 꿈과 다른 정연두의 꿈을 재현한 것일까. 또는 자신에게는 없는 상상력을 아이로부터 점잖게 혹은 과감하게 차용한 것일까.

"원더랜드"에서 아이들은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고 꿈꾸는 바, 즉 현상이 아닌 이데아를 드러낸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데아란 옮겨오는 순간 스스로를 비껴간다. 때문에 아이가 종이에 재현한 이미지는 일단 아이가 생각하고 꿈꾸는 그 이데아와 같을 수 없다. 정연두의 사진 역시 얼핏 보면 아이의 그림과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로부터 모티프와 아웃라인에 충실할 뿐, 같은 듯 다른 부분들이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더해지고 윤색되어 사실(아이가 그린 그림)과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연두의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의 꿈과 동심(童心)을 공유하고 상기한다. 그의 이미지를 사실과 허구, 닮음과 다름의 구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관대하게 만드는가.

No Matter What You See 애초에 우리는 아이의 그림과 정연두의 사진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이미 간파하고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지라는 것이 원래 생각과 꼭 같을 수 없고, 그림이 현실과 동일하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 관념이나 심상(心象)이 머리 바깥의 사물이나 이미지와는 같을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허구(fiction)는 사실(fact)과의 대조를 통해서만 부정(否定)될 뿐이지, 그 자체로는 기실 거짓(僞)이 아니다. 허구는 허구로서 참(眞)이다. 허구의 진실은 허구가 얼마나 허구스러운지에 달려있다. 허구가 허구로 충만할 때, 우리는 허구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허구의 실재(simulacre)가 드러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세계가 개시된다. "원더랜드"와 "로케이션"은 그런 점에서 실재의 위증(僞證)이 아니라, 하이퍼리얼리티의 실증(實證)이다.

특히 "로케이션"에서의 하이퍼리얼리티는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마치 잘 조립된 한편의 디오라마(diorama)를 보는듯한 효과도 유발된다. 언어 통례상 ‘로케이션(location)’은 중의(重意)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우선 사전적 용례로는 위치, 장소, 지점 선정 등을 함의하고, 그밖에 스튜디오 내에서의 세트 촬영과 달리 옥외에서 실재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을 촬영하는 방식을 함축한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현지(現地) 촬영, 현지 로케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정연두의 "로케이션"은 이 모두를 시사한다. "로케이션"에서 정연두 또한 영화에서의 현지 촬영처럼 실제 자연 환경을 찾아가 그곳을 담아내기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인공의 이미지나 오브제들로 대체, 조합한다. 그 결과, "로케이션"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자연을 마주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실재를 발견하게 된다. 즉 자연인줄 알았던 것이 인공(실제적 가상)이고, 이미지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실재(가상적 실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케이션"의 하이퍼리얼리티는 자연과 인공, 실재와 비실재, 가상과 현실, 사실과 허구 등, 이원적(dual) 요소들 간의 변증법적인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교차, 편집되는 ‘몽타주(montage)’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몽타주 구성은 우리의 지각에 단절(가상으로부터 실재를, 실재로부터 가상을 자각하는 순간)을 야기함으로써, 실재는 합의와 충돌의 몽타주로 이루어져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를 위해 정연두는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과정을 거치면서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내러티브는 적시(摘示)하지 않는다. 때문에 일상의 문화적 기치에 의해 가공된 실재이자 갈등과 충돌의 모처(某處)인 "로케이션"에서는 우발적으로 푼크툼(punctum)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관찰자의 무의식이 기입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실재가 아닌 사건(events)이다. 세계는 결코 실체적이거나 정체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연두의 작품 이면에는 실재와 비실재를 퍼포먼스로 짜깁는 가운데, 그 과정 중에 동반된 시간들을 다시 이미지로 덧입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진의 표면 너머로부터 탈루(脫漏)된 사건의 시간성(temporality)이다.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우는 "보라매 댄스홀"이나, 이번 전시에서는 소개되고 있지 않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8) 동영상 작업 등은 그런 측면에서 은폐된 사건과 시간성을 밝히는 일종의 시네마적 도해(圖解)로 파악될 수 있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건 속에 감춰진 충돌과 합의를 탈(脫)은폐하는 과정에서 정연두의 작품과 우리는 서로 간에 블랙박스(black box)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정연두의 작품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그의 작품 역시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읽을지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이에 끊임없는 해독의 과정이 요구된다. “예술은 그것을 예술로 보는 눈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J. Rancière), 『Le destin des images』) 그런 의미에서 정연두의 "로케이션"은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우리의 ‘로케이션’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로케이션은 모두 조작(操作)에 연루되어 있다. 위치를 잡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선택이라는 조작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가령 사진 촬영을 위해 사진가는 상황을 조작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입지(立地)를 선택할 수 없다. 즉 사진가의 로케이션과 조작은 동일한 하나의 제스처가 지닌 두 측면인 것이다. 이때 상황을 조작한다는 사실은, 그의 사진이 객관적 이미지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조작을 포기할 때 객관적 이미지를 얻게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어떤 하나의 이미지나 이념이 지닌 객관성이란 곧 어떤 상황의 조작에 따른 결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로케이션이 이렇듯 필수불가결적으로 조작을 동반한다면, 관찰자의 현존 자체도 하나의 조작이며, 그에 상응하여 관찰자의 관찰 역시 조작과 결부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정연두와 우리의 로케이션에 따른 관찰은 모두 각자의 내부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로케이션과 마찬가지로, 내부 관찰자로서 어떤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조작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관찰은 관찰된 현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또한 어떤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 일을 통해 변화된다는 점도 함축하는 것이다. 관찰은 그 자체로 관찰자를 변화시키며, 끊임없는 내부 관찰의 분화를 통해 관찰자의 변화는 지속된다. 그런 맥락에서 정연두의 작업은 실재의 관찰로부터 기인한 결과이자 동시에 실재를 변화시키는 예술적 실천이다. 아울러 그의 실천에 대한 관찰의 발로(發露)는 우리의 로케이션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이 역시 하나의 예술적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계속해서 정연두의 작업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예술학·미술비평 전혜현


  작가약력

왕칭송(Wang Qingsong, 1966~ )

-1966년 중국 흑룡강성(헤이롱지안) 출생
-1993년 스쫜 미술학교 졸업
-현재 베이징에서 거주하며 작업
-왕칭송은 근대적 사회주의의 재건이라는 격변 속에서 발견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당시 중국은 사회개방 이후 외국의 미술사조가 유입되면서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였고 그 역시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베이징으로 온 왕칭송은 스쫜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1996년부터 사진으로 전환하였고, 인간 군상을 등장시킨 연출사진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특유의 은유와 풍자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왕칭송은 BALTIC CENTRE(뉴캐슬), ICP(뉴욕), 베니스 비엔날레(베니스), 타이페이 현대미술관(타이페이)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하였으며 아시아 소사이어티(뉴욕), ICP (뉴욕), 모리 미술관(도쿄), 폴 케티 미술관(LA), 퀸스랜드 아트 갤러리(퀸스랜드), V&A(런던),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미술관(필라델피아)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연두(Jung Yeondoo, 1969~ )

-1969년 진주생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센트럴 세인트마틴 컬리지 조소과 수료
-런던대학 골드 스미스 컬리지 석사 졸업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
-정연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목 받았다. 그는 일상의 삶에 상상을 개입하게 하고 판타지의 세계를 현실에서 보여줌으로써 꿈을 가시적으로 실현시켜 주는 등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정연두는 플라토(서울), 국립현대 미술관(서울), 아시아 소사이어티(뉴욕) 등에서 전시했으며 2002년 제2회 상하이 비엔날레에서 아시아유럽 문화상을 수상했고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었다. 특히 2008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노스텔지어』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뉴욕 현대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알렉산더 칼더 재단, 에스티 로더 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